
CHUNG SANG GON
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
Radiant Yet Ephemeral
정상곤
Chung Sang Gon_Solo Show
Oct. 17 - Nov. 15, 2025
Opening | Oct.17, 5-7pm
정상곤 작가의 신작들을 발표하는 <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 Radiant Yet Ephemeral> 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작가는 작업실을 둘러싼 주변 산과 들판을 마주하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온 몸의 감각으로 그리는 그림, 빛깔과 색채의 언어로 말하는 그림, 즉흥적 붓질이 주는 유쾌한 속도감, 감각적인 그리기와 지우기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여유로움, 그의 그림에는 디지털문명에 떠밀려 우리가 잊고 산 것들을 조용히 끄집어 내어주는 서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성과 어우러진 붓질이 만들어 낸 우연한 형상들은 회화적 멋을 한 층 더 끌어올리며 풍경 너머 그림 속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 전시에는 작가가 최근 2년간 준비한 스물여 점의 회화작품이 새롭게 선보입니다.
CRITIQUE
정상곤 _ 운중 화랑 , 전시서문, 2025
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
박영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제가 그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것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정직하게 그립니다”(조너스 우드)
1. 정상곤은 자신의 작업실 인근에 자리한 대지산(大地山)을 산책하면서 접한 풍경을 그렸다. 산의 내부로 곧바로 직진한 시선 속에 부분적으로 걷잡힌 나무와 덤불 숲이 바닥과 함께 어질하게 밀려온다. 빠르고 격정적인 붓질과 중화된 색채의 더미 속에 풍경은 출렁이고 화면은 흔들린다. 그것들은 두서없이 모여든 나뭇가지와 풀들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리듬감을 추적해나간 동선이다. 특정 장소가 뿜어내는 현장감을 그림의 즉흥성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가는 가능한 의미와 해석을 거부하고 물질과 체험의 차원에서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산책길에서 접한 자연, 생명체에서 자신을 흔드는 어떤 경험을 한듯하다. 언어나 문자가 멈춰선, 그것들을 불구화시키는 ‘시적인 순간’이 그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강타하는 무언가를, 모든 일상적인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아찔한 경험과 인상을, 순수 자명한 세계가 아닌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세계로서 체득한 자연을, 동시에 인문화된 시선으로 읽어내는 풍경에 대한 단상을 그는 가능한 새롭고 신선한 풍경화, 이른바 풍경화의 장르적 클리세를 극복해나가는 풍경화를 시도한다. 그것은 개념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적 교감이나 반응, 몸으로 감각될 수 있는 현실과 사물의 세계를 포착할 방법을 찾는 일이자 기존 풍경의 해석과는 결이 다른 지점의 모색으로 보인다. 작가는 개념보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감각, 감성의 구현을 앞세운다. 자연은 선험적인 지식이자 정보에 의해 포착할 수 없다. 불가해한 저 풍경과 대면한 나라는 몸, 살을 통한 감각의 구현이 그림이 된다. 이는 대상의 재현이 아닌 공간 속에서 지각되는 사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일이자 행위를 통해 지각했던 끊임없이 유동하는 공간을 떠내는 일이기도 하다. 2. 작가는 자연을 관조하는 입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대상에 밀착된 시선은 보는 이들의 눈앞에 그것들이 현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안긴다. 그림에는 나무와 풀이 들어섰지만 실은 사계절의 빛과 색채에 겨냥되어 있다. 화면에는 특정한 대상이 자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그려나갔던 여러 흔적이 자욱하니 올라오면서 바탕 면과 물감층과 붓질의 흔적, 여러 선들의 교차를 숨이 가쁘게 보여준다. 꿈틀대는 붓질과 예리한 선들이 어지럽게 횡단하는데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것 같다. 이른바 획에 가깝고 작가의 감각, 감성을 실어나르는 흔적이기도 하다. 모든 자국은 특정한 움직임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 자국은 자신이 본 것을 옮겨 놓은 흔적이자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인상과 감정을 포착하려는 자취,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시도의 몸짓, 붓질에 다름아니다. 자연이 안기는 운율을 날카롭고 예리한 붓질로 기록하는 이 그림에서 새삼 동양화에서 접하는 필력과 세를 만난다. 붓을 다루는 모든 그림은 결국 생동하는 붓질, 대상의 본질을 추려내는 붓질에 겨냥된다. 무엇보다도 나무줄기들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들은 춤을 추듯이 뻗어나가면서 기운생동하는 어느 활약상을 그려 보인다. 아울러 그는 제한된 몇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 한다. 의도적인 한계 내에서 또 다른 표현의 장을 도모하는 이 작업은 색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색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한편 구체적인 대상이 들어오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질료로 환원되어 흩어진다. 동시에 물질들이 모여 여전히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흔적을 안겨준다. 구상과 추상이 뒤섞이고 이미지와 질료가 혼재된 이 풍경은 어느 사이로 좁혀들어간다. 2차원의 평면을 환기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평면을 활성화시켜서 동적으로, 생성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3. 부분적으로 절취된, 세계에서 뜯겨나온 이 풍경은 나무와 풀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대지산의 특정한 장소에서 추출한 풍경은 작가에게 인상적으로 본 그 무엇이다. 그러나 정상곤이 그린 것, 재현한 것은 특정 대상의 외양이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내부의 온갖 것들이다. 나를 둘러싼 외부세계는 그만큼 미지의 것이자 낯선 타자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름 지을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이 대상, 자연이다. 자연은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 역시 지극히 신비스런 영역이다. 따라서 자연을 모방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작가들은 그 자연이 회임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와 무수한 색에 절망한다. 그 절망과 도전 사이에 그림은 존재한다. 정상곤의 그림 역시 그 선상에서 떨고 있다. 이 그림은 실제 풍경을 대면하고서 그 풍경 앞에서 그 정령과 혼을 자기 몸으로 흡입해낸 자의 체득 안에서 가능한 어느 그림이다. 길고 가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풀 등은 흔들린다. 세상은 고정시킬 수 없고 생성 중이며 운동 중이다. 기후와 온도, 바람과 대기의 변화 속에서 시간의 격렬한 흐름 속에서 자연은 매 순간 격하게 변화를 거듭한다. 작가는 나무의 살아있는 상태와 힘의 동세와 생성 중인 시간을 그리고자 한다. 자연의 형태는 동적 상태다. 그러니까 “생성과정이고 또한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론은 변형론”이라고 그는 말한다. 수시로 떨어대는 세계를 고정된 화면 안에 온전히 응고시킬 수 없다. 화가는 그 흐름과 운동을, 기운을 더듬어 다시 보여준다. 정상곤의 풍경화란 자연/생명체의 미세한 기운, 호흡, 감촉, 섬세한 주름까지도 잡아내고 이를 형상화하려는 지난 한 시도에 해당한다. 사물/자연에서 인격적 풍모를 느끼는 이 애니미즘 체험은 ‘이 세상을 무(無)로 돌리지 않으려는 지성의 장치’(베르그송)에 해당한다. 무기적인 사물에 자기를 투영하여 보는 것이 바로 애니미즘 지각인 것이다. 작가는 “유난히 붉거나 검은 흙에서 나온 풀들, 그 사이에 흩어진 자연은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이 모순을 지닌 자연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은 돌멩이 사이사이에 우리들의 살과 피가 먼지가 되어 스며있다. 우리들의 삶과 영혼이 스며있는 것”(작가노트)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그의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독해하게 한다. 가시적이지 않지만 땅과 풀과 나무에 스며있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이자 추상적일 수 있는 이 땅의 역사적 사건들이 풍경의 징후로 나타날 수 있는 어느 지점을 찾고 있다. 자연을 그것들이 육화된 존재로 읽어내는 것, 인문적 시선이 투과한 풍경의 몸을 그리는 것이다. 4. 자연을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이 모순을 지닌 자연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배우고 깨닫는다. 한 유한한 인간의 삶의 비루함과 누추함이 자연 앞에서 치유 받는 것이다.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며 소멸시키고 다시 생성시킨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정상곤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대단한 힘으로 서 있지만 동시에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다름아닌 풍경에 대한 모종의 연민 의식, 그러니까 소멸, 사라짐, 우연성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자 모든 생명체에 바치는 애도일 것이다. 그의 말처럼 자연은 “얼마나 찬란하고 또 허망한가.”(작가노트)
Radiant Yet Ephemeral By Park Young-taek (Professor at Kyunggi University, Art Critic)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 honestly paint what is interesting in all the possible things I can paint.” (Jonas Woo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The artist Chung Sang-gon painted landscapes encountered during his walks on Daejisan Mountain, which is located near his studio. As his gaze penetrates directly into the interior of the mountain, the partially constrained woods and thickets, along with the ground, surge toward his vision in a dizzying array. The landscape sways, and the canvas vibrates amidst the rapid, impassioned brushstrokes and the aggregated mass of neutralized colors. These are the movements that trace the natural forms and rhythm of the indiscriminately gathered branches and grasses. He translates the immediacy of a specific location into the improvisation of the painting. I consider him an artist who rejects pre-determined meaning and interpretation and paints instead from the realm of materiality and direct experience. He seems to have had a compelling encounter—something that shook him—in the nature or lives he met along his walking path. Such an experience speaks of a 'poetic moment' where language and words cease, where they are rendered impotent. He attempts to render a newly possible, fresh landscape painting—one that overcomes the genre's inherent clichés—by capturing: something that strikes the human spirit; the dazzling experience and impression that transcends all conventional laws of nature; nature as an incomprehensible and opaque world, not a purely self-evident one; and, simultaneously, reflections on a landscape read through an anthropized gaze. These attempts appear to be a search for a way to capture the material exchange or reaction (which cannot be translated to concepts or language) or the world of reality and objects (which can be sensed by the body), and also a process of exploring a trajectory that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existing interpretations of landscape. The artist prioritizes the realization of ambiguous sensations or sensibilities over concrete concepts. Nature is not captured by a priori knowledge or information. His painting becomes the realization of the sensation felt through one's own body and flesh when confronting that inscrutable landscape. This is not the mere representation of an object, but an act of expressing the appearance of things as perceived in space, and of scooping out the ceaselessly fluxing space that was experienced through the act of painting. 2.The artist does not view nature from a purely contemplative standpoint. His gaze perceives nature as a living entity. Because of his close engagement with the subject, viewers strongly feel the presence of these elements before their eyes. The paintings contain trees and grass, but they are truly aimed at the light and color of the four seasons. His canvas is not merely occupied by specific objects; simultaneously, numerous traces of the act of painting these objects heavily emerge. The background, paint layers, brushstroke remnants, and a variety of intersecting lines are breathtakingly displayed. The wriggling brushstrokes and sharp lines traverse the surface in disarray, creating the illusion of movement. This is akin to the concept of the 'stroke' (hoek), a trace carrying the artist's sensation or sensibility. Every mark contains the memory of a particular movement. Thus, these marks are the traces of what he saw, the vestiges of an attempt to capture the impression and emotion triggered by the object and the physical gestures or brushwork of an endeavor to accurately render what was seen and felt. In his paintings, which record the rhythm imbued by nature with sharp and incisive brushstrokes, I am freshly reminded of the force of the brush (pill-yeok) and the power/momentum (se) encountered in Oriental paintings. All his acts of painting with the brush ultimately target the vibrant stroke, the one that draws out the essence of the subject. Above all, the sharp, keen lines of the tree trunks dance and extend, illustrating a vibrant and dynamic portrayal. Moreover, he attempts to express everything with a limited palette. In this work, which seeks another dimension of expression within the intentionally set constraints of color, what is important to him is not the color itself but prompting a reflection on the meaning that the color conveys. While his paintings contain concrete objects, these objects are reduced to and scattered as materials. Simultaneously, the coalesced matter shows traces that still evoke the external world. This landscape, a blend of figuration and abstraction, of images and materials, converges into a narrow space. It simultaneously evokes the two-dimensional plane while dynamically and generatively activating it. 3.Chung Sang-gon’s landscape soberly depicts only trees and grass; these are fragments of a scenery excised from the world. The landscape is extracted from a specific location on Daejisan Mountain, representing something that left a powerful impression on the artist. However, what the artist painted and represented is not the mere exterior of a specific object, but everything within the artist himself that was triggered by it. The external world surrounding us approaches as the other ones, unknown and unfamiliar. The object, nature, is what cannot be named or fully known. Nature cannot be wholly represented. The beauty of nature is also an extremely mysterious domain. Consequently, artists who imitate nature and are captivated by its beauty despair at the varied forms and countless colors that nature holds in gestation. Painting exists between that despair and the challenge. Chung Sang-gon’s painting also trembles along this line. This painting is only possible through the internalization of the landscape's spirit and soul—a drawing that stems from the artist's direct incorporation of the confronted landscape. The long, slender branches, leaves, and grasses sway. The world cannot be fixed; it is in a state of becoming and in motion. Amidst the changes in climate, temperature, wind, and atmosphere, and within the intense flow of time, nature fiercely changes moment by moment. The artist seeks to paint the living state of the tree, the dynamic force of its power, and the time in the process of formation. The form of nature is a dynamic state. Hence, he states, "This is a process of genesis and also of dissipation. Therefore, morphology is the theory of transformation." A world that is constantly shifting cannot be completely solidified on a fixed picture plane. The artist traces its flow, movement and energy, and reveals it anew. Chung Sang-gon's landscape painting is an arduous attempt to capture and give form to the minute vital energy, breath, texture, and delicate wrinkles of nature and living things. This animistic experience, which perceives an impersonal character in objects or nature, corresponds to Henri Bergson's 'mechanism of the intellect that seeks not to reduce this world to nothingness.' Animistic perception is precisely the projection of the self onto inorganic matter. The artist notes in his studio journal: "The grasses that emerge from unusually red or black soil, and the nature scattered among them, constantly transform yet remain eternally immutable. This contradictory nature provides vital logic for human life. Thus, our flesh and blood seep into the crevices between the stones, becoming dust. It is where our lives and souls are imbued." This attribution of meaning leads to a new reading of his landscapes. It makes us ponder that certain something that is not visibly manifest but is imbued in the soil, the grass, and the trees. In essence, he is seeking a point where the historical events of this land—both concrete and abstract—might manifest as a symptom of the landscape. It is the reading of nature as an embodied existence and the painting of a landscape body that has been permeated by a humanistic gaz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Nature constantly transforms yet remains eternally immutable. This contradiction inherent in nature provides a crucial logic for human life. People observe, learn from, and achieve realization through nature. The meanness and squalor of a finite human life are healed in the presence of nature. Nature continuously transcends itself through constant change, dispersing countless life forms. In motion, it restlessly shifts from one form to another. By ceaselessly moving, it creates, destroys, and dissipates existing forms, only to generate new ones. Through this vital activity of nature, humans reflect upon their own life. They secretly mirror their own finite existence against nature's boundless realm. Therefore, observing nature and living things is not about confirming the position of humanity as the absolute subject, but about participating in the 'Otherness of Infinity.' Following such a journey is precisely what Chung Sang-gon’s painting embodies. Perhaps this is why his paintings stand with tremendous power yet simultaneously evoke an atmosphere of solitude and melancholy. This is nothing other than a certain sentiment of compassion toward the landscape, namely a complex emotion of dissipation, disappearance, and contingency—and perhaps an elegy dedicated to all living things. As the artist himself puts it, how "radiant and yet ephemeral" nature is. (Artist's Note) This critique was written to commemorate Chung Sang-gon's solo exhibition “Radiant Yet Ephemeral” at the Woonjoong Gallery in October 2025.
MEET ARTIST

"종종 나는 특별한 상황에서 본 풍경에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하곤 한다. 그림의 대상인 풀과 나무들을 그리는 동안 붓질과 함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스치는 상념들(신념, 진정성, 이념,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 그리고 문득 마주하게 되는 그것들의 허구, 알고리즘, 민낯, 생로병사, 나이 들어감, 외로움, 상처 등)을 물감과 함께 짓이겨 놓는다."
정상곤 (鄭 尙 坤) Chung Sang Gon
Born in Seoul in 1963
EDUCATION
1991 MFA, Paint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1987 BFA, Paint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SELECTED SOLO EXHIBITIONS
2024 <Time lapse: Landscape Shadow>, Wave Art Space, Seoul, Korea
2024 Minuscape, Q-art Space, Korea
2023 Still Life_Memory_Scape, Gallery imazoo, Seoul, Korea
2023 Skin Deep_Still Life, Tong-In Gallery, Seoul, Korea
2023 Minuscape_Winter Forest, Gallery The FLOW, Seoul, Korea
2022 A Trivial Landscape, Khalifa Gallery, Seoul, Korea
2021 Minuscape , Novosibirsk State Art Museum, Russia
2021 'Chung, Sanggon's Scape Painting', Gallery The Flux, Seoul, Korea
2020 'Crossing the Spring', Gallery The Flux, Seoul, Korea
SELECTED GROUP EXHIBITIONS 2025 ART ASIA DELHI 2025 (Yahobhoomi 2C/2D), Delhi, India 2025 Outside Scenery , Yangpyeong County Museum of Art, Kyunggi 2024 The collector's Room, Gallery Hoho, Seoul, Korea 2024 The Icons, Woonjoong Gallery, Seungnam, Kyunggi 2023 Korea Galleries Art Fair 2023, CHUNG ART Gallery, Imazoo Gallery, Seoul, Korea 2023 Onset of Spring, Gallery Beka, Korea 2022 Korea Galleries Art Fair 2022, Bit Gallery, Korea 2021 Art Fair Daegu, Chungdan Gallery, Korea 2020 Nature: The East Sea and Dokdo, Seoul Arts Center, Korea 2020 The Phase of Korean Contemporary Landscape painting, The Museum of Choi buk, Korea Prospect: Nature, Sea, Dokdo and Eyes of Artist, Woljeon Museum of Art Icheon, Korea SELECTED AWARDS 2018 Novosibirsk International Triennial of contemporary graphic art 2018 (Russia) Grand Prix 2007 International Prints Triennial Oldenburg (Germany) Prize of City of Mayor of Oldenburg 2007 14th Tallinn Print Triennial, (Estonia) 3 Equal Prize 2004 13th Tallinn Print Triennial, (Estonia) 3 Equal Prize 2000 Cracow International Prints Triennial, (Poland) Regular Prize. 1999 Ljubljana International Biennial of Graphic Art, (Slovenia) Grand Prize 1998 11th Tallinn Print Triennial, (Estonia) Grand Prize 1997 Cracow International Prints Triennial, (Poland) Regular Prize. 1996 Seoul International Prints Biennial, Purchase prize. 1992 Dong-A Fine Arts Festival, First Prize. 1990 Korean Contemporary Prints Public Subscription, First Prize. The 9th Korean Grand Arts Exhibition, Second Prize. Space International Miniature Prints Biennial, Grand Prize. SELECTED PUBLIC COLLECTIONS Novosibirsk State Art Museum (Russia) Jeju Museum of Art (Korea) Park Soo Keum Museum (Korea) Alive Jincheon Printmaking Museum (Korea)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Korea)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Seoul Museum of Art (Korea) Municipal Museum of Arts (Hungary) The Korea Development Bank (Korea) International Centre of Graphic Arts (Ljubljana) The Art Museum of Estonia (Tallinn) HanWhan Museum (Korea) British Museum (England)
ART WORKS
EXHIBITION VIEW
ARTIST STATEMENT
작업실 뒷산인 대지산과 불곡산을 산책삼아 오른다. 가끔씩 산책길에서 마주한 풍경이 특별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한여름, 장마가 지나간 직후 빗물에 쓸려나간 흙무덤 사이에 매달려 있던 풀과 작은 돌멩이들이 드러날 때, 산책길 옆 그늘진 물웅덩이에 한줄기 빛이 들어 밝게 빛날 때, 혹은 늦은 가을날 이슬 내린 숲에서 유난히 붉은 빛깔의 이파리를 매달고 있는 나무를 만날 때, 겨울 숲에서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을 볼 때, 나는 그런 풍경들을 그림에 담는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산책 길 나무와 풀들이 특정한 계절의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만나게 되고, 또 그리는 과정을 통해 그 풍경은 자연 대상 자체를 넘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종종 나는 특별한 상황에서 본 풍경에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하곤 한다. 그림의 대상인 풀과 나무들을 그리는 동안 붓질과 함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스치는 상념들(신념, 진정성, 이념,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 그리고 문득 마주하게 되는 그것들의 허구, 알고리즘, 민낯, 생로병사, 나이 들어감, 외로움, 상처 등)을 물감과 함께 짓이겨 놓는다. 나의 그림은 때로는 다른 이미지들로 덧그려져 덮이거나 대상의 경계가 모호하게 표현 되곤 한다. 그것은 나의 관심이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개인들의 서사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작업에서 추상 혹은 추상성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데, 대상과 비 대상, 의도와 우연을 같은 가치로 취급하는 작업 태도를 지닌다. 사물의 형상 그 자체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추구는 어떤 대상을 마주하고 그림의 소재로 선택하면서 시작된다. 풍경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풍경을 대하는 나의 태도,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시시각각 마주하게 되는 우연과 선택의 결과로 인해 사물의 경계는 무너지고 그 허물어진 형태의 흔적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들의 총합이 나의 그림이라고 여긴다. 산과 들판, 풀과 나무들이 자연을 떠나 작가의 작업실에서 풍경-그림이 될 때, 그 이미지는 살을 맞대고 있던 물감이라는 껍질로서 비로소 우리와 만나게 된다. 풍경 이미지는 잡히기 전에 빠져나가고 그림에는 그 흔적이 남게 되는데, 나는 이곳에서 그 간극과 지연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일련의 지독한 자기애를 발견하곤 한다. (2025년 10월1일)
최근 산책에서 쓰러진 나무들이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마도 산돼지 무리가 나뭇잎 사이를 헤집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잡목과 낙엽더미들이 정리된 덕분에 누운 나무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슬픔에 빠지지 마세요. 표면의 빛나는 얼룩을 보세요.’ ‘이 얼마나 찬란하고 또 허망한가’ 그림을 시작하기도 전에 위와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2024년 10월 6일)
나의 그림에 있어서 '보잘것없는 것'과 '다시보기'라는 두개의 큰 축은 대학시절 이후 지금까지 나의 작업의 주된 키워드이다. 사실 보잘것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어떤 것도 있어야 할 이유가 있고, 또 그것에 대해 내가 알게 되면 아는 것만큼의 가치를 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늘아래 그 어떤 것이 가치를 뽐내고 무척 있어 보여도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무하고 허망할 때도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자세히 보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거나 그 어떤 것도 사실은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진 않다. 내가 관심하는 바는 그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보면서, 그 어떤 것도 무심히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보기' 는 진부한 일상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것에 대한 위대함을 느끼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2022년 10월 4일)
"바구니 정령들은 엮음새 장식 안에서 산다고 한다. 거기가 그들이 사는 마을이다. 여기에는 '문'도 있다. 거의 보일락 말락하게, 그러나 의도적으로 파손품 같이 구멍을 내 엮음새 모티브의 연속성을 끊는게 바로 문이다. 이 문은 정령이 죽으면 천상에 올라가 체류하라고 정령을 밖으로 빠져나가게 만들어주는 구실을 한다." (‘오브제들에 관한 시선’ 중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붓 터치들 사이 혹은 사물과 배경의 경계 어딘가에 비백과 같은 '문'을 만들어 그림의 숨구멍을 내는 일과 비교해 본다. (2022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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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곤 -깊은피부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풍경은 그것을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살아난다. 사실 사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 방식에 따라 그 외연이 달리 보일 뿐이다. 세계/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마음결에 의해서이다. 그래서 풍경은 역사적이고 경험적이며 인문적이다. ‘순수한 자연풍경'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풍경이란 개념 속에는 주어진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내지는 모종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서양의 풍경화란 장르와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을 보는 관점의 차이, 세계관이나 존재론의 편차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자연 속에 자리한 정상곤의 작업실에는 창문 밖의 풍경이 화면에 질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젤이 아닌 테이블에 캔버스를 올려놓고(눕혀놓고)위어서 내려다보며, 방향을 바꿔가며 연필 선으로 그려놓은 스케치를 따라가고 있다. 이 전일적 시선 아래 다루어지는 화면은 일시점나 원근법이 개입할 수 없다. 몸 전제가 주어진 화면, 그 표면에 순응하면서 붙어나가고 있다. 주어진 캔버스의 피부에 달라붙어 그 살을 애무하고 풍경의 표피, 껍데기를 형상화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몸, 감각이 화면 안에서 그림을 이루는 질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같은 그림 그리기는 동양의 전통회화에서 가능했던 체험이다. 하늘의 시선에서 내려다보고 대지에 뭇 생명체들이 발아하듯 그렇게 이미지를 가설하고 주어진 재료와 순응하는,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림 속에서 실현되는 것 말이다. 또한 그 같은 시선은 주체의 독점적인 눈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관찰하는 일방적인 망막중심주의와는 달리 세계에 대한 개념이나 정서. 태도를 수행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몸으로 체험하고 경혐하는 삶이고그리기이다. 옛사람들은 삶이나 학문, 그림 그리는 일을 모두 동일한 수행의 차원에서 다루었다. 여기서 수행이란 이른바 세상의 이치 ‘도’를 깨닫고 이를 추구하는 삶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상곤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작업 태도, 방법을 ‘수행적 태도'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그림의 방법들, 스타일과 매너란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필연적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자 현실에 대한 반응, 가치와 경험에 대한 언급과 맞물려있다. 그러니 그에게 회화의 방법론, 스타일은 결국 세계에 대한 몸의 반응이고 감각의 구현이며 모종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그 무엇이 된다. 그래서일까 무척 드라마틱 하고 멋들어진 풍경의 전형성을 과잉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의 프레임으로 들어온 풍경들은 기존 풍경화와는 무척 다르다. 그는 깊은 산 속이나 원시림의 느낌을 주는 자연 풍경을 다룬다. 자신이 직접여행을 통해 접한 자연과 작업실 주변의 자연이 한 공간에 콜라주 되었다. 실재하는 풍경이자 허구적인 풍경인 셈이다. 나로서는 화면 하단에 그려 넣은(더러 화면 가득 클로즈업을 해서 부각시킨) 작은 풀이나 나무가 주목된다. 아마도 그는 그 비근하고 보잘것없지만 강인한 생명력(에너지)을 지닌 존재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항상 사물/생명체가 내지르는 힘과 발산, 기운 등에 주목해왔다. 한편 기존 풍경화의 상투형 들을 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풍경화는 상상력으로 조합된 허구의 장면이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실 그것이 어떤 장소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을 보는 자신의 감정, 감각과 경험이다. 차연에서 얻은 그만의 감흥, 감성의 진실성'을 어떻게 화면에 그림으로 구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효과적인 회화의 방법론, 스타일이 요구된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이미 정해진 고정적이고 관습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회화는 기존의 상투형 틀에서 부단히 자기만의 감각적인 회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림이란 감각의 구현이다. 한 작가의 몸, 감각이 세계와 반응해서 얻어진 결과물이 침전되어 있는 장소가 회화의 공간이다. 정상곤의 화면은 들끓는 질료들의 혼돈 상태를 드러낸다. 화면은 천체적으로 유동적이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이나 흔들림, 눅눅한 습기와 끈적임, 떨림의 상태로 지욱하다. 격렬한 운동감이 느껴지고 시간의 흐름과 그 풍경을 대면했을 때 파생되는 감각의 멀미들이 밀어닥치는 듯하다. 흡사 영상적으로 진동하는 화면이자 디지털적 감성이 아날로그적 그리기와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다. 유화물감을 녹이는 용매제의 과잉은 화면 전체를 습하게 만들어놓아 화면 안에 놓인 물성들은 고정되지 못하고 부유한다. 물감을 묽게 흘리고 번지고 빠르고 격렬하게 붓으로 긋고 칠하고 문질러댄 자취들만이 가득하다. 필연과 우연이 공존하고 이미지와 질료가 넘나들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혼재하고 표면(껍질)과깊이가 뒤섞이는,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회화다. 몇 겹의 층을 이루는 표면의 흔적이 얼핏 산과 바위, 폭포와 나무, 풀들을 떠올려준다. 그것들은 대기감 속에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습기와 바람, 훅 하고 덤벼드는 숲의 눅눅한 내음, 물소리 등을 환각적으로 안겨주는 편이다.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인 물질과 용매재, 그리고 물리적인 법칙의 순응과 함께 몸놀림, 그림 그리는 매 순간 개입하고 반응하는 몸의 감정, 감각의 층 차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흔적으로 가득하다. 경험했던 자연풍경을 기억하고 그림 그리는 순간 창문밖에 자리한 자연풍경을 바라보면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수렴해서 매 순간 펼쳐지는 물감의 물질적 기호들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오래전에 그가 제작했던 일련의 석판화가 떠올랐다. 그 회화적 자취로 흥건했던 석판화스타일이 현재의 풍경화에 오롯이 환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예술은 모종의 깊음을 갈망하는 일이다. 그러나 깊음은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표피와는 상충되는 수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은 수평에 수직을 세우고 깊이를 파고 무한히 횡단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얇은 표면에 엄청난 깊이를 파는 일이고 날카로운 감각을 새기는 일이다. 그래서 회화는 ‘깊은 피부'를 만드는 일이다. 평면은 분명 그림의 실존적 조건이자 제한된 공간이다. 그 평면에 감각의 줄을 긋는 일, 깊이를 만드는 일이 바로 그림 그리기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행적인 시간은 물감과 붓질/몸짓을 통해 깔린다. 여기서 색과 붓질(몸짓)은 감각적인 회화에 관여한다. 윤곽을 지닌 확고한 외곽선에 의해 지탱되는 그림은 기하학이나 이성에 관여한다면 아울러 이미 선험적인 코드에 의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정상곤이 보여주는 유동적인 붓질, 떨리는 몸짓, 흔들리는 시간, 꿈틀대고 녹고 번지는 색채는 감정과 감각을 우선하면서 세계를 몸으로 반응해 받아들이고 내뱉기를 거듭한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자연처림! 그는 캔버스에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가 경험한 날것의 풍경, 그 풍경의 살과 내음을 표현하는 그만의 회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으로 세계를 세우는 일이다. 기존 풍경화/회화라는 코드를 부단히 벗어나거나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상곤은 여전히 전통적인 매체인 캔버스와 유화, 붓을 통해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그리기를 수행하면서, 저 역사적인 풍경화를 다시 그린다. 그러나 그는 풍경을 다시 읽고 스타일을 문제 삼는다. 납작한 캔버스 표면에 감각의 줄질을 한다. 그래서 화면 위로는 감각의 묘선들, 혼잡한 감각들이 이룬 붓질, 색채, 질료 덩어리, 몸의 놀림들이 지나가고 얹힌다. 그가 칠한 색과 질료덩어리는 단지 윤곽선으로 이루어진 내부를 채우거나 장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순수상태의 회화적 사실을 구현해낸다. 자기 붐의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풍경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토록 않은 표피 위에 무한한 깊음을 갈망하면서 말이다. 2012년 9월 5일~ 9월 23일 금산갤러리에서 열린 정상곤 개인전 도록 서문
표면과 깊이가 상호작용하는 풍경 고충환 (미술평론) 완제품에 앞서 시제품으로 만들어보는 모델을 프로토타입이라고 한다. 보통은 3D 프린터를 이용해 모텔을 만드는데, 같은 원리를 2차원 패널에 적용해 전자기기 부품에 필요한 기판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원리 그대로 판화에 원용한 것이 프로토타입 혹은 프로토에칭이다. 정상곤은 근작에서 이런 프로토에청기법을 원용한 일련의 등판화를 제작해 보인다. 보통 판화는 판 제작과정에서부터 작가가 일일이 수공으로 판을 만들기 마련인데, 프린터가 판을 대신 만들어주는 점이 다르다. 이미지의 크기와 복잡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하나의 이미지가 새겨진 판을 원기 위해서 하루가 꼬박 걸리거나 이틀 이상이 경과될 때도 있다. 이 기계적인 공정을 거치고 나면 최초 원본의 입력된 값 그대로 이미지로 새겨진 동판을 얻을 수가 있다. 보통은 이렇게 얻어진 동판을 프린트해 동판화를 제작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판화는 상식적인가 ,비록 최초 원본을 입력한 것은 작가이지만, 이외에 일체의 공정을 프린터가 대신해준 기계적인 산물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 그렇지가 않은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작가는 진즉에 디지털 매체며 방법론을 도입해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해왔는데, 특이한 것은 매번 아날로그를 디지털 쪽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수렴해 들이는 식의 확장(역확장?), 아날로그 쪽에서 보자면 디지털을 아날로그의 일부로서 포함하는 식의 내포적인 확장을 꾀해왔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하이테크놀지보다는 로우테크놀로지에 창작 주체의 관심이 쏠려 있는 일부 의미 있는 테크놀로지아트의 현상이며 생리에도 부합한다. 테크놀로지 자체의 기술적인 구현과 완성도보다는 테크놀로지와 존재(혹은 실재)와의 관계를 묻는 인문학적실험을 위한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근작 역시 예외는 아닌데 작가는 기계적인 과정을 공정의 일부로서 도입하지만, 여기에 작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해 기계적인 과정이 원활히 수행되지 못하게 방해한다. 방해한다? 작가 식의 표현대로라면 흔들어놓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해하고 어떻게 흔들어놓는가 . 알다시피 기계는 최초 원본의 입력된 값 그대로를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작가는 이 기계적인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최초의 입력값에는 없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로 원본에는 없는 라인을 만든다. 이를테면 입력된 값 중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오가는 직선거리를 반복수행하게 조작함으로써 인위적인 선을 얻는 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트리밍의 과정이 부가된다. 원하는 부분을 강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지워 없애는 것인데, 때로 여기에 흔들리고 겹쳐 보이는 이미지를 부가하거나 아예 판에 새겨진 이미지 자체를 사포로 지우기조차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면서 최소한의 이며 얼룩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겨진 흔적이며 얼룩은 뭘 말해주는가. 작가에게 지우기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우면서 드러내고 지움으로써 비로소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은 뭔가. 존재증명? 원본에 대한?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부터 원본이 유래한 것에 대한?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대한? 아예 처음부터 원본 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작가가 원본으로 차용한 정보적 사실, 이를테면 창덕궁 정경과 그 일부인 그 수령이 500년도 더 된 한 쌍의 회화나무는 화면에서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감각적 실재로서 존재하는가. 정보적 사실과 감각적 실재는 동일시될 수가 있는가, 작가의 작업은 감각적 실제 자체보다는 정보적 사실로 화해진 감각적 실재를 재현하는 속에 방점이 찍힌다. 여기서 지우기는 결정적인데, 다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이고(표면적인 이미지, 특정 주제를 강조하는 이미지, 선동하는 이미지, 유혹하는 이미지를 폭로하기 위한) 개념적인 이유 (사람들은 결코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그 이면에,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한) 때문에 그렇고, 때로 여기에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이유(물질적인 이미지, 질료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혹은 정보적 사실로부터 감각적 실재를 구제하고 복원하기 위한) 때문에 그렇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작가의 작업은 정보로 화해진 원본 이미지를 얼추 어림잡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입견에 의해서 겨우 나무와 숲과 기와집 정도를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접하는 이미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들은 사실은 많은 경우에 한갓 정보며 개념이며 선입견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작업은 그리기와 지우기, 드러내기와 숨기기, 기계적인 과정과(건축설계도면 혹은 청사진을 연상시키는) 아닐로그적인 과정이(감각적 실제를 비껴가는 드로잉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스크래치) 상호작용하면서 특유의 물성을 부각한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여하한 경우에도 실재 자체며 존재 전체를 인식(그리고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의 인정일 수 있고, 흔적과 얼룩과 그리고 특히 부재를 통해서 존재틀 다만 암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의 주지일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암시되는 현실 말하자면 세계가 화면 속에서 재구조화되는 지각적(혹은 회화적) 현실을 제안한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감각적 실재가 정보적 사실로 화해지면서 누락된 것들, 이를테면 바람과 공기., 흔들림과 머뭇거림, 첨부되고 첨삭된 것, 이행과 생기와 같은 자연과 주체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것들의 오롯한 복원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동판화와 함께 석판화를 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의미작용 역시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이를테면 집에서 키우는 화초를 볕이 잘 드는 마당 한쪽에다 내놓는다. 그러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햇볕의 기울기가 달라짐에 따라서 그림자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그림자, 짙은 그림자와 엷어진 그림자, 중첩되고 포개진 그림자, 그 자체 시간의 추이며 경과를 증명하는 그림자를 얻는다. 동판화 작업이 감각적 실재가 정보적 사실로 화해지면서 누락된 물성을 복원하는 것에 바쳐졌듯, 석판화 작업에서 감각적 실재가 추상적 실재로(실루엣) 화해지번서 탈락된 시간을 복원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실재의 궤적을 복원한다. 그렇게 복원된 궤적을 그저 무분별해 보이는 붓질과 구별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실재는 진정 복원된 것인가. 시간을 복원하고 바람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감각적 실재와 정보적 사실, 감각적 실재와 추상적 실재와의 관계를 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삭제되고 덧붙여진 것들, 실재자체와 주체에게서 실재 쪽으로 건너간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묻는다. 작가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대략 다시 읽는 풍경, 피부의 깊이, 풍경처럼, 그리고 결핍의 풍경 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겠다. 하나같이 풍경들이다. 예외적인 경우로 피부의 깊이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 피부란 주체가 풍경과 만나지는 주체의 표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피부의 깊이란 풍경의 깊이에 그리고 특히 표면의 깊이에 다름 아니다. 모든 표면은 깊이를 가지고 있다. 표면은 그저 표면이 아닌, 깊이가 자기를 밀어 올린 것이다. 정보적 사실은 감각적 실재가 자기를 밀어 올린 것이고, 그렇게 그림자에는 감각적 실재가 함축돼 있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런 표면과 깊이와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표면을 통해서 표면을 그리고 깊이를 통해서 깊이를 이야기하기는 쉽다(미시담론과 거대서사에서처럼 양분된 담론의 지형도가 흔히 그렇듯).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표면을 통해서 깊이를, 정보적 사실을 통해서 감각적 실재를, 추상적 실재(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평면을 통해서 움직이는 것을, 정지(혹은 순간)를 통해서 시간을 이야기하기란 쉽지가 않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남다른 의미가 있고 예사롭지 않음이 있다. 다시, 작가의 작업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역확장한다. 세계를 기호화하는 것이 디지틸의 기획이라고 이해한다면, 세계를 개념화하는 것(인식작용)에 이미 디지털은 예고되고 있었다. 여기서 풍경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세계가 개념화되고 기호화되는 과정에서 누락된 실재를 복원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풍경은 기호와 개념이 파열되면서 그 틈새로 자기를 밀어 올린 실재의 살(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이 전개되는 지평이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실재의 꼴을 그리고있었다. 2016년 11월 10일 ~ 11월 23일 샘터갤러리에서 열린 정상곤 개인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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