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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CHUN-HWAN

 

 


Kim Chun-Hwan_Solo show


 

Apr 6th - May 4th, 2024

Opening | Apr 6th,  4-8pm

 

 

 "초대합니다."

운중화랑은 봄꽃 가득한 계절 사월을 김춘환 작가의 신작을 발표하는 기획전 “김춘환 전”으로 시작합니다.

김춘환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를 주된 거점으로 “누구 하나 닮았다고 평하기 어려운” 그만의 고유한 작품성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주요 재료로 종이를 사용합니다. 종이작업을 하는 작가는 많지만, 김춘환 작가만큼 이전에 없었던 특유의 방식으로 종이를 활용하는 작가는 흔치 않습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종이작업을 30년을 넘게 지속하며 고유하고 명징한 예술세계를 일구어 왔습니다.

김춘환 작가가 사용하는 종이는 잡지, 광고지 등 인쇄물입니다. 수많은 정보가 빠르게 생겼다가 소비되고 사라지는 오늘날 정보시대를 함축하는 상징으로 인쇄물을 채용한 것입니다. 다종다양한 인쇄물들은 정보시대의 대표적 매개체로 기능하지만, 그 생성 이후 길지 않은 시간 이내에 대부분 그 효용을 다하고 곧 폐기되거나 어딘가 치워질 운명에 처합니다. 이미 그 기능이 소멸되었거나 소멸 직전인 인쇄물들이 김춘환의 손을 통해서 다시 강고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1995년 파리에 정착한 이후 작업 기반으로서 종이를 만난 것은 운명적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 스스로 종이와의 인연이 유년시절 아버지의 목재소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무 부스러기나 톱밥더미에서 놀며 경험했던 유년시절 감촉과 호흡들이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낯선 땅에서 되살아 났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톱밥가루의 감촉은 낱장의 종이를 찢거나 오리는 행위로 전이되어 화폭 위에 새로 피어나고, 종이를 찢는 마찰로생기는 먼지들은 톱밥가루 날리는 어린 시절 목재소와 시공간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아득한 시절의 놀이가 이렇게 그의 작업의 근간이며 그 미감의 원천이 됩니다. 그의 작업은 마치 농부의 일과 닮아 있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고 모종을 키운 후 밭에 옮겨 심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는 일련의 과정은 그의 작업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는 좋은 인쇄물을 찾아 이를 색에 따라 분류하고, 찢거나 자르거나 접거나 뭉쳐내는 등의 다양한 손동작으로 그가 원하는 조형물을 만든 후에, 이들을 화면에 옮겨 붙입니다. 그에게 인쇄물은 작품의 씨앗이고, 손동작으로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싹을 틔우고 모종을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부가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듯이 작가는 이 형상들을 화면에 옮겨 붙이고, 다시 다듬고 키웁니다. 손끝으로 종이를 직접 느끼며 작업을 계속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작가 자신의 의식이나 감각을 초월하면서 화면은 어느새 어떤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그 재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지만, 익숙한 재료로부터 만들어진 형상은 낯설은 경우가 많습니다. 익숙함과 낯설음이 혼재함으로써 자아내는 미감은 놀라울 정도로 신선합니다. 때로는 거대한 물결이 출렁대는 바다를 닮기도 하고, 바람에 일렁이는 곡식 같기도 합니다.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 떼도, 여름날의 세찬 소낙비 줄기도 있습니다. 둘둘 말려 빼곡히 진열된 포목점 원단들도 있고, 책꽂이에 편하게 포개진 책들도 보입니다. 작품의 씨앗이었던 인쇄물들은 처음에는 온전한 하나의 화면이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색채도 글씨도 형태도 모두 와해되어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시 탄생됩니다. 어디를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보는가에 따라 그 형상은 시시각각 변신을 거듭하는데, 여기에 또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평면에 그치지 않고, 입체, 설치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됩니다. 입체작업은 또 다른 깊이를 더합니다. 작가는 손동작으로 낱장의 인쇄지들에서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 다시 이것들을 모아 하나의 종이 덩어리를 만듭니다. 그 덩어리 한 부분을 통째로 잘라내면 단면이 드러납니다. 그이 기억 속 목재소가 원목을 자르듯이, 작가는 스스로 기억 속 목재소의 톱날이 되어 종이 덩어리를 절단하고 그 단면을 드러냅니다. 이 단면에는 처음 작가의 손동작으로 인쇄물이 구겨지던 과거 시점, 덩어리가 절단되는 또 하나의 특정된 과거 시점, 그리고 감상자가 보는 현재 시점이 모두 혼재되어 있습니다. 실존하는 단면이 시간 흐름의 공허함을 인식하게 하는 순간이 됩니다. 절단기계로 잘라내며 드러나는 인쇄지의 절단면들이 이루는 주름들은 통나무의 나이테를 닮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작가의 종이 덩어리는 그 재료의 근원(根源)인 목재 내지 통나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작품의 재료인 인쇄물을 다시 그 근원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이작업을 통해서 정보 만능의 대량소비사회 이면을 풀어 헤치는 김춘환의 작업이 누보레알리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누보레알리즘이 허무주의와 정신문명에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소비주의나 물질주의를 비판했던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김춘환의 작업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공허함의 미학을 끌어낸 점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매서운 시선으로 재료의 속살을 드러내고 가려진 물질의 본성을 실존적 기법으로 뒤집어 냅니다. 통나무를 절단하는 묵직한 톱날에 의해 성장의 비밀을 간직한 겉껍질이 속을 내보이듯이, 종이덩어리들을 기억의 목재소를 통해서 잘라 냄으로써 나이테를 닮은 주름을 언어로 하여 현대사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춘환 작가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작가가 색(色)에 접근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물감 없이 색을 구현합니다. 최근 작업에서는 하나의 광고지에서 추출한 동일한 인쇄물 즉 반복된 인쇄물에서 동일한 색상을 뽑아 색을 추출합니다. 기존의 안료에서 발색되는 색상과는 전혀 다른 인쇄지 특유의 물성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인쇄 안료의 고유색, 표면의 광택, 찢어지고 잘리면서 드러난 섬유질, 이것들이 서로 섞여서 몽환적인 색채를 만들어 냅니다. 이 과정에서 잡지 속 다양한 텍스트와 이미지는 모두 색으로 해체되고, 최초의 안료가 종이에 인쇄되기 전에 가졌던 원래의 색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물감 없이 색을 만드는 그만의 프로세스로 인하여 그를 색채의 연금술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의 색연금술은 물감 대신 종이를 사용한다거나 종이를 물감으로 바꾼다는 물리적 차원의 연금술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는 인쇄된 색종이가 거꾸로 색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연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물감이나 작품으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색을,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인쇄된 색종이를 통해서 발견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인쇄물이나 작품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한 바 없었던 새로운 색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에게는 자신의 시각예술을 창조하고 완성하는 경험입니다. 그의 작업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자연에는 존재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던,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제련소입니다. 운중화랑의 새 전시 “김춘환 전”에서는 김춘환 작가의 최근 미발표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지난 작업과정을 담은 중요한 작품들을 함께 전시합니다. 벚꽃이 피는, 정확하게는 벚꽃이 활짝 피기를 희망하는, 봄날 주말에 이 시작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바랍니다. 운중화랑 대표 김경애 | 2024. 3

"INVITE YOU" Woonjoong Gallery begins April, the season when spring flowers are in full bloom, with a special exhibition titled “Kim Chunhwan Exhibition,” which presents new works by artist Kim Chunhwan. Kim Chun-hwan is mainly based in Korea and France and is recognized for his unique work that is “difficult to criticize as being similar to anyone else.” Paper is used as the main material in his works. There are many artists who work with paper, but it is rare to find an artist who utilizes paper in a unique way that has never been seen before like Kim Chun-hwan. He has unwaveringly continued his paper work for over 30 years, creating a unique and clear world of art. The paper that Kim uses as material for his works is printed matter such as magazines and advertisements. Printed materials are used as a symbol of this information era, where an enormous amount of information is created, consumed, and disappears quickly. Various printed materials function as a representative medium of the information era, but most of them expire within a short period of time after their creation and are destined to be discarded or put away somewhere. Printed materials that have already lost their function or are on the verge of extinction are brought back to life through the artist’s hands. After majoring in fine arts at an art university in Korea and settling in Paris in 1995, we can say that his encounter with paper as a basis for his work was fateful. He himself says that his connection with paper began during his childhood in his father's wood mill. The textures and breaths he experienced while playing in piles of woodchips and sawdust during his childhood were embedded in his unconscious and were revived in Paris, a place unfamiliar to him. The feel of the sawdust passing through his fingers is transferred to the act of tearing or cutting a piece of paper and becomes a new work of art on his canvas. The dust created by the friction of tearing paper is a passage connecting time and space with the sawdust-blowing wood mill of his childhood. The fun play of his distant past becomes the basis of his work and the source of his aesthetics. His work resembles that of a farmer. The process of a farmer sowing seeds, sprouting them, growing seedlings, transplanting them to the field, fertilizing them, and pulling out weeds is almost identical to his work. He searches for and picks up appropriate prints, sorts them by color, uses various hand movements such as tearing, cutting, folding, and bunching to create the shapes he wants, then transfers them to the screen. For this artist, printed matter is the seed of his work, and the process of creating the desired shape with hand movements is no different from sprouting and growing seedlings. Just as a farmer transplants seedlings into the field, the artist transfers these shapes onto the screen, refines them, and grows them again. As the artist continues to work while feeling the paper directly with his fingertips, at some point he will transcend his consciousness or senses, and the screen will take on a certain shape without him even realizing it. The materials he used were very familiar, but the shapes created from familiar materials are often unfamiliar. The aesthetics created by the mixture of familiarity and unfamiliarity are surprisingly fresh. Sometimes they resemble the sea with huge waves rolling around, and sometimes they resemble grains swaying in the wind. There are clouds moving with the wind and strong rain showers on a summer day. There are fabrics rolled up and tightly displayed, and books comfortably stacked on bookshelf. The prints that were the seeds of his work were initially a complete screen, but in his work, all colors, letters, and shapes disappear and are reborn as completely different images. Depending on where you look, in what direction, and how far away you look, the shape changes constantly, which is another fun thing to see. His work takes various forms, including three-dimensional or installation. Another depth is visible in three-dimensional work. The artist uses hand movements to create various shapes from single sheets of printed paper, and then gathers them together to create a single lump of paper. He cuts off a part of this lump, exposing its cross section. Just as the wood mill in his memory cuts logs, the artist uses the saw blade of the lumber mill in his memory to cut the lumps of paper and reveal their cross sections. In this cross-section, the past perspective when the artist first crumples the print by hand, another specific past perspective when the lumps are cut off, and the present perspective as seen by the viewer are all mixed together. We may become aware of the meaninglessness of time through the existing cross-section of paper lumps. The wrinkles formed by the cut surfaces of the printed material that are revealed when it is cut with a cutting machine resemble the growth rings of a log. We wonder if the lump of paper the artist created symbolizes wood or logs, the origin of the material, and if his work is a process of returning the printed matter, the material of the work, back to its origin. Kim Chunhwan's work, which explores the dark side of a mass consumer society overflowing with information through paper work, is sometimes evaluated as an extension of nouveau realism. Nouveau Realism criticized consumerism and materialism, arguing for a return to nihilism and spiritual civilization, and this can also be seen in Kim Chunhwan's work. However, we should pay more attention to the fact that Kim's work does not stop at criticizing consumerism and materialism, but draws out the aesthetics of emptiness within it. He reveals the inner skin of materials through his thorough gaze and brings out the hidden nature of materials using existential techniques. Just as the saw blade of a wood mill cuts logs to reveal the secrets of growth, the wood mill in his childhood memory records modern society by cutting lumps of paper and using wrinkles resembling tree rings as language. We especially must not forget the way this artist approaches and uses color. He expresses color without paint or pigment. In his recent work, he extracts color by picking the same color from identical prints, that is, repeated prints. The unique properties of printing matter, which are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colors produced by existing pigments, appear on his screen. The unique colors of the printed pigment, the gloss of the surface, and the fibers revealed when torn and cut, all mix together to create faerie and alchemy colors. In this process, all the various texts and images in the magazine are dismantled into colors and are returned to the original colors they had before the first pigment was printed on paper. Due to his unique process of creating color without paint, he is sometimes called the color alchemist. His color alchemy is not limited to the physical dimension of using paper instead of paint or turning paper into paint. The artist believes that printed colored paper can create colors in reverse. Ironically, through already printed colored paper, he is trying to discover new colors that clearly exist in nature but that we have not been aware of through paints or works of art. The process of discovering new colors that no one has consciously used in print or work before is an experience that allows him to create and complete his own visual art. His studio is a smelter that creates new colors that no one has ever seen before, that exist in nature but that no one was aware of. Woonjoong Gallery’s “Kim Chunhwan Exhibition” displays important works from artist Kim Chunhwan’s past work process, focusing on his recently unpublished works. begins on a spring weekend when cherry blossoms are blooming, or more precisely, when the cherry blossoms are expected to be in full bloom. We cordially invite you to this wonderful exhibition. Woonjoong Gallery Derector | Kim Kyung Ae

MEET ARTIST

김춘환 사진.JPG

Bom in Incheon in 1968.

B.A.L.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M.A.L University Paris 8

Live and work in France since 1995

 

Solo exhibitions

2024 Woonjoong Gallery, Sungnam, Korea

2022   Ganaart NineOne, Seoul, Korea

2020   RX Gallery, Paris France

2019   ilwoo space, ilwoo foundation, Seoul, Korea

2018   Choeunsook Gallery, Seoul, Korea

2016   Artus Gallery, Brussels, Belgium

2016   Choeunsook Gallery, Seoul, Korea

2014   Holly Hunt, New York, USA

2012   Ethan Cohen Fine-Arts, New York, USA

2008   Insa art center, Seoul, Korea

2007   Trader pop Gallery, Maastricht, Netherland

2007   Gallery Gana-Beaubourg, Paris, France

2005   Gallery Chosun, Seoul, Korea

2004   Trader pop Gallery, Maastricht, Netherland

2003   Gallery Chosun, Seoul, Korea

2001   Trader pop Gallery, Maastricht, Netherland

2000   Gallery Chosun, Seoul, Korea

ART WORKS 
 

EXHIBITION VIEW

EXHIBITION VIDEO

ARTIST STATEMENT

 

언제부터 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내 우편함이 반가운 친구나 가족의 편지대신에 수많은 종류의 인쇄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일상생활은 소비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너무나 다양한 생산물들과 정보 매체들, 특히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사용의 일반화에 의한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도 있다.

 

내 작업은 현재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가 새로움이라는 이름 하에 시시각각으로 만들어 내는 수많은 정보, 그리고 이미지들의 생산 소비와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초래한 일상에서의 문화적 혼돈에 대한 반응이다.

내 작업을 구성하는 형식적인 방법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꼴라쥬 기법이다. 부치기(coller)는 재현의 공간속에 현실의 파편들을 끌어들여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의 오브 제들과의 지속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꼴라쥬를 하는 당사자, 즉 나와 현실세계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시키는 것이다. 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지금 현재 우리 일상의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오브제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우리들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내 꼴라쥬들은 단순한 개념의 예시나 감정의 투사가 아닌 일상의 다른 시간들 속에서 현실을 인지해 나가는 한 방법이며 사회 속에서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오려 내거나 특수한 이미지들의 부분을 차용하여 화면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꼴라쥬와 내 작업은 구별된다. 우선 주면에서 얻어진 광고 인쇄물과 잡지들을 모은다. 모아진 인쇄물과 잡지를 한장씩 뜯고 구겨 나무로 만든 판넬 위에 빽빽이 부쳐 일정한 두께를 가진 종이 덩어리를 만든다. 종이를 구기는 젓은 종이의 변형과 함께 그 안에 담겨진 이미지들을 파괴시키는 작업이다 이렇게 변형된 이미지들의 파편들을 숨 막힐 정도로 판넬 위에 집적시켜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들의 상호 간섭과 뒤섞임을 통해 이미지의 상쇄와 의미의 감소를 증폭시킨다. 판넬 위에 종이를 부치는 과정은 화면의 구성이라는 측면보다는 구겨진 종이들과 나와의 조응이다. 대결이 아닌 상호 교류의 과정인 것이다. 종이가 하나씩 부쳐지면서 내 자신의 호흡과 함께 종이들이 만들어내는 자체의 형태들이 판넬 가득히 생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에 모든 것을 떠맡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이 덩어리들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 내도록 한다. 이러한 우연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화면의 시각적 자율성과 다양성을 부여한다. 표면 절단은 내 작업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제재소에서 거대한 자연 원목들이 기계톱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에 기인한다. 그것은 절단과 삭제를 통한 흔적과 변신의 과정이다. 즉 파괴가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절단은 작업 과정 중에 일어난 종이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꼴라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던 여러 흔적들을 외부로 불러내는 것이다. 절단은 한 화면 안에 겉과 속, 안과 밖을 동시에 보여주어 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절단은 외부 세계에서 내부세계로 가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 꼴라쥬들은 종이의 다양한 움직임과 종이의 본질적 물질성이 살아 숨 쉬는 소박한 안식처이다. 잘려져 나간 종이들이 우리의 시선을 내부로 인도할 때 그 절단면 주름의 파장들은 표면의 흔적들과 함께 퍼져 나가게 한다. 이러한 주름의 파장은 기억(종이의 물질성과 행위의 반복)을 불러들인다. 결국 내 작업에서의 꼴라쥬들은 기억의 공간이다. 이 기억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진정한 일상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과정이다.

CRITICISM

김복기/ 한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춘환. 그는 소비사회와 정보사회를 견인하는 잡지를 주재료로 삼아, 그 '문화의 거울' 같은 인쇄물을 콜라주하는 작품 방법을 지속해왔다. 김춘환의 콜라주는 실로 '재료의 연금술'이라 불러도 좋다. 서정적인 모노크롬 추상에서부터 네오다다(Neo-dada)나 누보레알리즘의 조형 이념에 견줄 만한 입체, 설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더불어 그 콜라주에는 사회 비평'의 매서운 시선이 관통하고 있다. 김춘환의 작품은 '콜라주 회화'라 부를 수 있다. 그는 잡지를 짖어 다양한 방식으로 접거나 구기거나 말아, 본드로 조밀 조밀하게 집적해 조형의 밭을 일군다. 그 조형의 밭을 손으로 짓이기거나 날카로운 칼이나 톱으로 다듬어, 미묘한 뉘앙스의 표면을 만들어낸다. 물감도 붓도 사용하지 않는다. 인쇄물 그 자체가 색채요, 종이를 누르거나 자르는 행위가 붓질에 해당된다. 결국 종이라는 오브제 자체를 온전히 작품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춘환의 '콜라주 회화'는 기존의 콜라주기법과는 차원이 다르다. 콜라주는 캔버스나 종이같은 지지체 위에서 성립하는 조형 방법론이다(일반적으로 콜라주는 자르고 나서 붙이지만, 김춘환의 콜라주는 붙이고 나서 자른다). 콜라주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사지( 四指)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적인 조형요소이다. 부착된 사물이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림 속의 가상의 이미지로 참여하는 이중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러나 김춘환의 콜라주는 작품의 몸통 그 자체다. 종이가 지지체이자 표면이다. 종이가 작품의 건축적 골격이요, 동시에 파사드(facade)인 셉이다. 왜냐하면 접은 종이를 마치 모종을 심듯이 수직으로 세워 구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그의 '콜라주 회화'는 평면이 아니라 부피가 충만한 부조이거나 입체에 더가깝다. 이쯤이면 김춘환의 작품을 '오브제 회화'라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노크롬 추상에서 입체, 설치까지 김춘환의 콜라주는 평면 회화에 가까운 작품부터 입체, 설치에 이르기까지 활짝 열려 있다. 콜라주라는 지지체를 유지하면서 표면에 얼마나 더 적극적인 후속 조형행위를 가미하는가 가 작품의 관건이다. 우선, 모노크롬의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있다. 이 부류의 작품은 레디메이드의 외피.그러니까 잡지 인쇄물을 구성하는 색채나 사진 글씨 디자인 등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화면의 조형적 뉘앙스로 적극 활용한다. 잡지를 접거나 구기는 패턴, 그 하나하나의 단위(unit)를 반복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화면은 천변만화의 표정을 드러낸다. 작품의 표면은 바람이 넘실대듯이 혹은 물결이 출렁이듯이 부드러운 곡선의 결을 그리거나, 빗발치듯 혹은 급류가 흐르듯 속도감 넘치는 사선의 결을 그려내기도 한다. 소용돌이치는 자연의 에너지를 떠올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거시세계나 미시세계의 표면, 혹은 싱싱하게 살아서 퍼덕이는 이름 모를 생명체의 군락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있다. 참고작품 ;푸른노트, 나무패널 종이 150x150cm, 2005 김춘환은 추상적인 패턴의 동어반복(tautology)만으로도 작품의 필요충분 요건을 채우고 있다. 기본적으로 콜라주의 강력한 표면 질감, 그 물리적 촉각성이 불러일으키는 정감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종이 허리의 단면을 자르는 가공의 비밀이 가미되어 있다. 인쇄물을 접어 세운 단면을 칼로 자르면, 얇은 종이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 가녀린 선이 만들어진다. 애초 종이를 접거나 구겨 접착하는 과정에서는 예견할 수 없지만, 화면의 표면을 자르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표정들이 도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 겹으로 구긴 종이 모서리를 자르면, 종이의 속살이 나이테처럼 흰 선으로 오롯이 드러난다. 또 감싸였던 내부의 여러 색깔이 불쑥 삐져나오는가 하면, 새로운 구멍이나 이랑이 생기기도 한다. 종이의 성질에 따라 혹은 본드의 접착 강도 차이에 따라 자르기 이후 표면의 변화는 각기 다르다. ‘콜라주 회화'중에는 자르기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개입시킨 작품이 있다. 콜라주로 일정한 두께를 만든 후, 톱으로 대담하게 표면을 절단하는 작품이다. 김춘환 작품에서 콜라주 덩어리를 자르는 일은 인쇄물의 내장을 드러내는 일이다. 색채 측면에서 보면, 자르기는 인쇄물의 화려한 색채를 지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화면을 크게 나누어 높낮이가 다르게 표면을 자른 부조 작품은 그라인더로 돌을 갈아내거나 작두로 나무를 내리치는 조각적 행위를 떠올린다. 잡지 속에 실린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화(無化)시켜버리는 이 짜릿한 역습! 이 행위에는 앞의 추상작품보다 훨씬 더 다다(Dada)적인 공격 파괴 냉소의 조형 태도가 엿보인다. 김춘환의 콜라주는 원래 입체작품에서 출발했다. 그는 1995년 파리에 유학했다. 대학시절 서양화과에서 환원주의적 추상회화 교육을 받았던 그는 유학 초기에 '그리는' 작업을 재고하고 조각 언어에 새로운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정에는 여러모로 우연치 않은 이유가 있었다. 마침 그 당시 김춘환은 한국의 조각가 S선생의 파리 작업실 지척에 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무거운 조각작품을 운송할 때 사용하는 나무 파렛트(pallet, 적재용- 깔판)나 패키지를 작품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탈(脫)회화적 조형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일치하는 일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목재소를 운영했던지라 어린 시절부터 나무 켜는 일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자투리 나무 조각으로 장난감을 만들었던 이력이 있었다. 일찍이 오브제, 덩어리에 대한 감각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친구가 잡지 300여 권을 선물로 주고 갔다. 이렇게 해서 나무와 종이가 만난 것이다. 처음에 김춘환은 잡지를 뜯어서 짓이긴 콜라주 덩어리와 나무 파렛트가 공생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작품의 기본 몸체는 여전히 나무였지만, 물감 대용으로 알록달록한 잡지의 인쇄물이 채 효과를 한껏 발산했다. 이후 나무를 버리고 콜라주 덩어리만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콜라주를 압축해 벽돌이나 식빵 덩어리처럼 만들었다. 한쪽 표면은 콜라주의 색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한쪽 면은 콜라주 덩어리를 톱으로 해 압축된 속 내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온갖 이미지와 텍스트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뚱거려 부분과 전체의 경계를 탈맥락화하는 개념성이 깃들어 있다. 김춘환의 입체작품은 누보 레알리즘과 양식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 대량생산된 일용품을 플라스틱상자나 폴리에스텔 수지에 처넣은 아르망의 시리즈라든지 자동차를 작은 블록 모양으로 찌부러뜨렸던 세자르의 조각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반까지만 해도 파리 화단에는 누보레알리즘의 흐름이 존속하고 있었다. 일찍이 뒤프렌 앵스 로텔라 빌글레 같은 누보레알리스트들은 거리에서 뜯어온 광고 포스터를 콜라주 혹은 데콜라주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현대 소비사회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광고를 통해 시대상을 파헤치는 흐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김춘환도 파리에서 알게 모르게 누보레알리즘의 공기를 마시고있었는지 모른다. 참고작품 ; 종이 철 45x30x8cm 2003 김춘환의 입체 중에는 잡지를 짖어내고 남은 제본(folding) 부분만을 쌓은 작품이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 등의 내용은 모두 간데없고 책 등 짝 부분에 잡지 이름과 연도, 호수만 간신히 남아있는 형국이다. 풍부했던 김춘환/ 김복기 피와 살은 모두 사그라지고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처참한 잡지의 잔해가 아닌가. 또한 그는 작품 제작 중, 잡지를 찢고 남은 조각들이나 표면을 자를 때 떨어져 나온 작은 부스러기를 비닐봉투에 담아두었다가 작품으로 재활용한다. 그 인쇄물의 파편을 여러 개의 작은 캔에 담아 철판에 자석으로 부착한작품도 있다. 이른바 재료를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 개념이 들어있다. 또 근작 중에는 120호 캔버스를 세워 삼각기둥을 만들고, 그 벽면에 각국의 잡지 표지를 붙여 그 위를 랩으로 감싸는 설치작품도 있다. 이렇게 일별해보면 김춘환은 한 권 한 권의 잡지를 부위별로 온전히 작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쯤이면 가히 '종이의 연금술'이라 해도 좋다. 이미지 과잉의 소비사회 비판 김춘환은 잡지를 작품의 기본 재료로 삼고 있다. 그 잡지는 미술 패션 철학 경제 요리 등 이 세상사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한 작품에 탄생(발행) 시간대가 다른 잡지가, 언어가 다른 잡지가, 지적인 잡지와 대중잡지가 공존한다. 종이의 질도 편집도 각기 다르고, 수집한 경로도 서로 다른 잡지가 김춘환의 작품 안에서는 '만인 평등'을 외치듯 뒤섞여 있다. 왜 하필 잡지인가. 그는 잡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작가 자신은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언제부터 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내 우편함이 반가운 친구나 가족의 편지 대신에 수많은 인쇄물로 가득 채워졌다. 나의 일상은 소비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생산물,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일반화에 따른 이미지 홍수 속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다. 내 작업은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가 새로움이라는 이름 아래 시시각각으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 그리고 이미지의 생산 소비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초래한 일상의 문화적혼돈에 대한 반응이다.” 김춘환은 잡지라는 인쇄물의 개념적 인용과 조형적 변용을 통해 대량 소비사회, 정보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문에 개입하고 있다. 그 내용은 실로 폭넓다. 무엇보다 일상에까지 만연된 이미지의 포화와 그 부조리, 우리 의식 깊숙이 까지 과잉 공급되고 있는 이미지 홍수의 어두운 그늘을 꼬집는다. 그의 콜라주는 거꾸로 화려한 이미지 속에 가려진'저류(undercurrent)'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새상품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소비 욕망을 한껏 부추기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가버리는 새로움의 사이클, 그 상업주의의 가벼움을 조롱한다. 그의 콜라주는 '유행'의 덧없음을 반어적으로 노래한다. 흐르는 것, 변하는 것 이면에 놓인 본질적인 것을 겨냥한다. 또 한편 뜨거운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만 이내 새로운 뉴스에 밀려나 쉬이 잊히고 마는 저 얄팍한 인간 감성의 속성에 탄식한다. 그의 콜라주는 '정보=배설'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는 세태를 비꼰다. 그리하여 김춘환의 작품은 종이를 다시 '구축'해 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실상을 '해부'한다. 그는 자신의 화집에 콜라주의 예술적 지표인 듯, 이런 문구를 내세웠다. Folding the image-unfolding the real. 김복기, 2018

박영택/ 인쇄물의 기이한 환생 종이만을 사용해 조형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도 꽤 있다. 종이라는 존재, 물성을 다양한 변형태로 보여주는가 하면 그것이 기존의 회화를 대체하고 더 나아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김춘환의 경우도 그렇다. 그 외에도 무척 많은 작가들이 종이가 지닌 매력을 흥미롭게 연출한다. 김춘환은 잡지와 신문, 각종 광고홍보물과 전단지, 매뉴얼과 전화기록부 등 종이로 된 모든 유형의 인쇄물을 재료로 다룬다. 그것들을 모아서 쌓거나 배열하고 채운다. 그러니까 그는 인쇄된 종이를 사용해 이를 집적시켜 덩어리를 만든 후 그 표면을 커팅해서 보여준다. 우선 기존의 인쇄물들을 낱낱이 해체하고 조각을 낸 후 이것들을 가지고 다시 물리적인 크기, 평면으로 만든다. 그것은 깊이를 지닌 종이부조, 일종의 콜라주다. 특히 종이의 단면이 절단되는 순간 기묘한 쾌감과 공격성을 접하고 또한 종이의 속살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그 표면 절단 행위에서 기존의 인습과 지식, 이데올로기, 상식과 가치를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듯한 단호함 역시 만난다. 인쇄된 책자나 정보가 담긴 종이를 찢는 다는 것, 종이덩어리를 만든 후 그 표면을 커팅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지닌 실용적인 차원을 무화시킨다는, 파괴시킨다는 제스처다. 읽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정보 자체를 지워내고 삭제시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실과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서 소통하고 학습하며 길들여지게 하는 상황에 대한 무척 비판적인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일상생활은 소비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너무나 다양한 생산물들과 정보 매체들, 특히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사용의 일반화에 의한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서서히 잠식되어가고 있다. 내 작업은 현대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가 새로움이라는 이름 하에 시시각각으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정보 그리고 이미지들의 생산 소비와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카니즘이 초래한 일상에서의 문화적 혼돈에 대한 반응이다...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지금 현재 우리 일상의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오브제다. 그 안에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우리들이 생생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내 콜라주들은 단순한 개념의 예시나 감정의 투사가 아닌 일상의 다른 시간들 속에서 현실을 인지해 나가는 한 방법이며 사회 속에서 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작가노트) 그가 만든 것은 부조적 화면이자 기이한 회화다. 그는 종이를 물감처럼 다룬다. 그림이라는 것이 캔버스라는 용기에 물감을 독특하게, 다채롭게 담아내는 것일 수 있다면 그는 물감 대신 종이를 주어진 박스, 나무 패널에 담는다. 여기서 그림의 내용은 그 형태, 물리적인 크기와 규격이 규정한다. 주어진 틀 안에서 종이는 자신의 피부를 보여준다. 사각형의 용기나 둥그런 깡통 혹은 다양한 오브제 안에 종이를 채워 넣는다. 그것은 종이를 체적화 시키고 얇은 단면의 종이장을 물질덩어리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종이는 전혀 색다른 존재로 탈바꿈된다. 집적과 절삭 등을 거쳐 원래의 종이는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다면 파괴나 해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또 다시 새로운 존재로 환생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 종이는 알록달록한 색상과 문자, 사진 등으로 인쇄된 것이기에 그것이 짓이겨지고 뭉개지고 깍여나간 부위가 그림처럼, 하나의 추상회화처럼 다가온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비로 그 면/ 단면이다. 종이는 수직의 깊이로 박혀있는데 우리의 눈은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현란한 표면을 맴돈다. 그것은 시각을 현란하게, 정처 없이 만든다. 그의 작업은 분명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 못지않게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연출효과가 흥미롭다. 물감과 붓질로 이루어진 회화가 아닌 오로지 종이가 집적, 배열되거나 그 단면을 예리하게 절삭한 자취, 상처들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화려한 색상과 미묘한 질감으로 촘촘히 물결치고 파동치는 그 모습에서 무척 회화적인 표면을 만나고 있다. 종이들은 마치 유기적인 생명체나 살아 약동하는 존재들로 파득이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소비되고 소멸될 운명에 처한 덧없는 인쇄물들이 더없이 매혹적인 존재로 살아나면서 환각적 장면을 선사한다. 박영택 2009.

나경희/ 고리타분하게 본질을 바라보는 방법 무엇을 전공했나? “원래 회화를 전공했다. 작품을 보면 다들 조각을 전공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하다 보니 회화보다는 이렇게 조각처럼 직접적으로 작품에 가 닿는 방식이 내 기질에 훨씬 잘 맞았다.” 작품이 회화라고 하기에는 조각 같고,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회화 같다. “부조에 가깝다. 벽에 넣은 문양처럼, 평면이 아닌 요철 느낌의 부조다.” 처음에는 주로 어떤 작업을 했었나? “1995년 4월 파리에서 처음 묵었던 집이 조각하는 선생님 댁이었다. 그분 작품을 운송할 때 나무 박스를 많이 썼는데, 처음에는 뜯어진 나무 박스들을 가져다가 태우고 긁고 물감으로 그리다 잡지책에 관심이 갔다. 우연히 쌓아놓은 잡지책을 보고 ‘물감 쓰지 않고 색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처음부터 잡지라는 매체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유학하던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보던 잡지들을 넘겨줬다. 친구가 5년 동안 구독했던 인테리어 잡지가 지하실에 쌓여있었다.” 종이의 어떤 매력에 끌렸나. “사람들이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종이를 쓰면 색이 바래지 않는가’다. 종이니까 당연히 변한다. 사람은 안 늙나? 똑같다. 꼭 젊은 20대만 좋은 게 아니지 않나. 나이마다 풍기는 이미지가 있다. 종이도 시간에 따라 변해간다. 심지어 같은 작품 안에 쓰였더라도, 재활용 종이는 변화가 빠르고 질이 좋은 종이는 변화가 늦다. 내게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노르스름해지면서 색이 날아가는 느낌이… 나무나 쇠는 종이가 변하는 느낌을 못 잡는다.” 종이가 어떻게 작품으로 변하는가? “먼저 잡지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잡지가 별로 없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경비실 아저씨가 모아주시기도 한다. 파리에서는 벼룩시장에서 사거나 차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여행사의 철 지난 카탈로그, 부동산 매물 브로슈어 등을 모은다. 한 작품에 수 천장이 들어간다.” 잡지를 모은 뒤에는? “물감 팔레트처럼 색별로 분류한다. 흰색은 흰색끼리, 붉은색은 붉은색끼리. 그 다음에 구겨서 붙인다.” 왜 굳이 종이를 구겨서 붙이나? “구기지 않고 그대로 붙이면 다 알지 않나. 구겨버리면 이게 싸구려 의상 광고인지 샤넬 광고인지 모른다. 상하 개념이 사라지는 거다. 판넬 안에서는 평등해진다. 작품 제목이 <Under Currents>, 표상 밑의 흐름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보통 Up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등한 본질을 잊기 쉽다. 철학 잡지든 가십 잡지든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해준다는 본질은 똑같다.” 구겨서 붙인 다음에 다시 굳이 잘라내는 이유도 궁금하다. “잘라낸다고 하면 흔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내 작품에서는 오히려 잘라냄으로서 더해지고, 지움으로서 하나가 더 나온다. 실제로 볼륨을 잘라내면 두 색이 동시에 나온다. 종이 본연의 흰색과 인쇄돼 얹어진 색. 잘라냈기 때문에 두 색이 섞이게 되는 거다. 필요 없기 때문에 네거티브라서 잘라내는 게 아니라,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잘라낸다. 단순히 구겨진 볼륨은 주름이 10개 뿐이지만, 이걸 자르면 주름이 20개, 30개로 증식된다.” 표면을 보면 자르기보다 썰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종이 한 장 한 장은 약하지만, 풀칠해서 뭉치면 나무나 돌처럼 단단해진다. 계속해서 자르려면 손이 뻑뻑해지기 때문에 쉬어야 한다.” 색이나 패턴은 어떻게 결정되나? “모인 잡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똑같은 잡지더라도, 인쇄된 상태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결코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두 번 다시 이 색을, 이 주름으로 구겨서, 이 위치에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르고 붙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나온 즉흥적인 결과물들이 쌓여서 화면 전체의 이미지가 나온다.” 반복 속의 즉흥성이라. “작업을 할 때도, 손에 잡힌 종이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종이를 집어서 풀칠해서 붙인다. 사진이나 광고 이미지 중에서 ‘이 선 재미있네’ 싶은 게 있으면 그 선 느낌으로 가기도 하고.” 잡지가 사라진 미래에 이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된다면 어떨까. “누군가 그랬다. 나중엔 없어서 귀한 골동품이 될 거라고. (웃음)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음악을 들을 때도 LP로 듣는 게 좋은데, 온도와 습도에 따라 바늘이 레코드판을 긁는 침압이 순간순간 달라진다. CD로 듣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사람들은 구식이라고 하지만 요즘 가수들도 LP로 음악을 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스크린을 터치해서 바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 앨범을 직접 보고 만지고, 판 위에 얹어서 매번 미묘하게 다른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가 좋은 거다. 언뜻 보면 레코드판의 바늘이 돌고 도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순간도 똑같지 않은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나와 닮았다.” 작가인터뷰 - 나경희, 2022

심상용/ 프랑스 누보레알리즘의 한 경향인 벽보파[Affichists]는 우리가 도시라고 부르는 삶의 공간 온갖 권력과 억압의 응집체, 카인의 두려움에서 출발한 삶의 양식, 미학적 빈곤함의 물줄기들이 모여 형성된 늪지 이기도 한 그것에 주목했다. 도시 안에서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의 고유한 논리로 기획되고 재단된 젓을 빤다. 미학적 집단학습을 강요받고, 삶의 양식이라고 해봐야 고작 그것의 모방 재현을 크게 벋어 나지 못한다. 도시는 이미 오래 전 사람이 견디는 수준을 넘어섰지만,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는 그 유독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벽보파 화가들이 이러한 문제와 맞섰다. 벽보파 화가들이 ‘’도시의 피부’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김춘환은 이 시대의 만연한 소비주의로부터 시작한다. 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현대적 삶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제로, 소비주의적 삶의 세례요 영성체임이 분명하다. 현대인의 그것 -소비주의 -을 통해, 신상품을 얼마나 빨리 구매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 김춘환 세계의 미학적 기반이 여기에 있다. 소비주의는 (벽보파 화가들이 특히 문제 삼고자 했던) 서구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 완결판 인데다, 물밀 듯 쇄도해 오는 미국적 삶을 구성하는 핵심부품이기도 하다. 벽보파 작가인 자크 빌르글레[Jacques Villegle]는 도시전체를 뒤덥다시피 한 포스터와 벽보들, 이미지들과 문자들의 홍수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와 문명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일부를 수집해 그 상태 그대로, 또는 더 찢거나 하는 방식으로 제시했다. 프랑세모엥대로[Boulevard Francais Moyen]의 익명의 벽에 부착되었던 포스터들, 문자들, 색들이 그의 손에서 때론 정치적 메시지로, 때론 미적 정취로 거듭난다. “인간성, 그것이 곧 진리이다[Humanity, c’est la verite]”라는, 1957년 파소니에 거리를 지나던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던 낙서는 왜 아니겠는가. 김춘환의 이미지들은 상업적 인쇄물들, 특히 패션잡지에서 찢겨져 나온 것들로, 이 것이 중요하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꼴라쥬 회화로 통칭되지만, 이는 이 세계의 절반의 진실에 해당될 뿐이다. 재료의 연금술이라는 개념도 다른 전제가 없이는 오독[誤讀]에 이를 개연성이 크다. 뜯기도, 찢겨져 나가고, 구겨진 잡지의 페이지들은 결코 중립적인 ‘재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각각의 것들은 재료가 아니라 미적 단위로서, 사용되는 대신 발화한다. 그의 꼴라쥬-회화를 재료처리와 관련된 일종의 질서 세우기로 전락 시켜선 안 된다는 의미 에서다. 이 꼴라쥬-회화의 정수는 꼴라쥬[Collage]가 아니라 데꼴라쥬[Decollage], 즉 붙이기가 아니라 붙이기 이전의 떼어내기에 더 있다. 실제로 작가는 전체 작업 과정 중 적절한 종이를 고르는데 절반의 시간을 보낸다. 찢겨진 낱장들을 붙여 “두터운 색제로 묘사한 추상화처럼” 보이도록 하는 과정은 상업 잡지를 낱장으로 뜯어내어 해제시키는 데꼴라쥬의 그것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김춘환은 벽보파 화가들이 길거리의 포스터를 찢거나 변형 시킴으로서 문명의 오류를 고발하고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으로, 상업적 잡지들을 분해하고, 찢고, 구기고, 칼이나 톱으로 대패질하듯 표면을 잘라내기도 한다. 화려한 인쇄물들, 잡지의 현란한 낱장들의 소비주의가 시지각에 대해 범했던 과도한 교란을 마치 단죄라도 하듯! 그리고 그 단죄로부터 구원의 볕이 들기 시작한다. 김춘환이 현대가 쏟아내는 극우적 정보와 이지지를 대하는 그런 거친 방식은 예컨대 드골의 정치노선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OUI’-영어로 YES의 의미다-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찢겨진 상태로 제시했던 빌르글레의 접근과 맥락적으로 닿아 있다. 벽보파의 또다른 화가인 레이몽엥스[Raymon Hains]의 <이 남자는 위험해[C’et homme est dangereux]>도 같은 맥락의 참조로 언급 할 만한데 이 찢겨진 포스터의 주인공은 삐에르 푸자드[Pierre Poujade]라는 인물로, 알제리와의 식민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찬미했던 사업가다. 엥스는 푸자드의 벽보를 찢은 익명의 행인들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김춘환이 보여주는 버려진 패션잡지, 광고 인쇄물들의 잘려 나간 단면은 그 자신의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문명의 단면이다. 빌르글레와 앵스가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던 도시의 벽보에서 당대를 관류하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확인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공통점만큼 차이에 방점을 찍을 차례다. 김춘환의 세계는 빌르글레나 앵스의 찢겨진 포스터에 배어있는 선현한 정치적 메시지를 앞세우지 않는다. 이 세계가 가담하고 참여하는 방식은 훨씬 연금술적이다. 선언이나 강령은 이 세계가 발화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이 세계를 “모노크롬의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어떤 것으로 마음껏 편입시켜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김춘환의 작품들을 국내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작금의 어떤 모노크롬-미니멀리즘 미학의 편린이나 연장으로 슬쩍 규정하려 드는 것은 더더욱 경계해야 할 독해임에 틀림이 없다. 이 세계에서도 벽보파의, 누보레알리스트들의, 더 나아가 자신의 문명을 행해 외치는 사람들의 역사와 마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컨텍스트에서 뜯겨져 나온 것들의 ‘꼴라쥬 – 마티에르’가 만들어내는 넘실거리는 뉘앙스의 형태로, 구겨지고 겹쳐진 결들의 저 깊은 데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강렬하거나 부드러우며, 세련 되거나 거친 물화 된 표면에만 시선을 제안하는 대신, 꼴라쥬-마티에르의 저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배음[背音]을 듣기위해 청력도 함께 사용할 것이 권장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사실상 작가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버려지거나 방치된, 가난한 것 들에서 진실을 직관하도록 하는 힘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들의 정제된 질서를 부여해 그때까지의 주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다. 김춘환의 세계 역시 친구로부터 건네 받은 여러 뭉치의 과월호 대중잡지 들에서 시작되었다. 이 영역에선 꽤 익숙한 그 시작에서 역사와 문명의 값진 진전이 허용되는 것이다. 심상용, 2012

조나단 굿맨/ 너무 과해서 감당하기 힘들다? 대량소비주의 시대에서 물질은 사고의 과정 없이 구매되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물건은 가격의 높낮음과 상관없이 대량경제 안에서 그 가치를 빠르게 상실하고 폐기되어 진다는 사실을 우리 대부분은 잊고 있다. 작가 김춘환은 예술의 체계를 완성하여 그것을 통해 사물에 대한 인간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잡지나 개인적인 편지에서 추출한 산물을 구겨 패널에 고정시켜서 재료들을 집적한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작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두껍고 복잡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그는 이 같은 행위를 통해 제재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나무판을 다듬던 모습을 바라보던 자신의 기억을 모방한다. 엄청난 양의 광고 인쇄물로 만든 고도로 조밀 복잡다단한 표면을 통해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일상에 내재된 이미지 포화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동시에 광고물에서 차용한 형상화된 이미지 조각조각들을 인상적으로 배치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매체에 대한 작가의 참여와 개입을 감지하게 한다. 그는 콜라주를 통하여 자신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각각의 이미지는 기억의 한 조각을 구성하고 전체의 콜라주는 기억에 대한 작가의 재현임을 보여준다. 작가의 작업 프로세스로 말미암아 작품의 표면은 압도적일만큼 두껍다. 어떻게 저런 두께의 인터페이스가 완성될 수 있는지 관람객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동시에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작품은 우리 의식 안으로 과잉 공급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조롱이다. 희화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오브제가 아닌 이미지에 압도된다. 이미지는 절단 과정을 거치며 훼손되지만 최신 패션과 자동차, 보석 등의 광고와 함께 회람되는 잡지가 존재하는 문화권의 사람이라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프로세스 중심적 접근을 강조했고 작품이 지니는 상업적 의미를 최소화시켰다. 비록 작품 표면에서 개별의 오브제를 구분해내는 것은 힘들지만 그 안에 자리 잡은 작가의 사회 비판은 거침없다. 작가의 시각적 전략이 사회 비판에 적극 개입될수록 그 전략은 더욱 강력해지고, 정치적 요소를 작품의 구성 요소 하나로 이해할 때 그의 작품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그러나 작가의 사회적 개입을 그의 지극히 정교하고 세련된 시각 지능과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인쇄물의 내용을 관람객이 알아 볼 수 없도록 처리한 후 작업에 사용한다. 대신에 우리는 작가가 프레임 안에 배치한 수많은 낱장의 종이로 구조화된 거대한 추상 패턴과 마주하게 된다. 사회 비판을 위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거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놀랍도록 효율적인 추상 이미지로 변신한다. 김춘환은‘광고 인쇄물과 잡지는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술의 한 형태이다. 이 안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방식의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놀랍게도 작가가 콜라주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일상의 묘사와 밀접하다. 콜라주 기법은 복잡하고 미술사적으로 정의된 예술적 행위지만 결국엔 보통의 인간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잡지에서 찢겨져 나온 낱장이 구겨지고 캔버스 위에 한 장 한 장 고정되면서 작품의 파사드는 완성된다. 풀로 종이를 붙이는 행위는 작품 전체의 게슈탈트 안에서 작가가 창조해낸 자아와의 대화라고 작가는 말한다. 대다수는 아니지만 꽤 많은 작가들이 작업 프로세스와 자아에 대한 지각에 밀접한 상호 연관성을 부여한다. 김춘환은 방법론에 있어 단순화를 의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자신의 창작 전략에 투영한다. 이미지를 전체성 안에서 관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광고 이미지 안에서 인간의 이 같은 면면들을 재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비록 종이를 자르는 행위가 매우 파괴적인 행위일지라도 이것은 이미지적 자유를 유도하기 위해 일정한 폭력성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예술 세계가 보다 개방됨을 확신한다(우리는 작가가 현대인의 일상 행위의 한 부분으로 동사‘즐기다’를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그의 작품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우리 시대의 이페메라(Ephemera)를 저장해둔 각 개인의 기억의 보관소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일상의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법에 변화를 주고 형태 (종종 감춰진 형태) 자체에 집중한다. 때때로 김춘환의 기법은 제한된 공간 내부를 폐기물 혹은 바이올린과 같은 값비싼 오브제로 가득 채우는 프랑스 예술가 아르망(Arman)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에서 차용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 비평과 미학적 서술, 둘 모두를 위한 균형적인 언어를 탐구하며 그는 현대미술계에서 독창적이며 독립적인 자신만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력한 질감의 콜라주 표면은 도발적이며 동시에 위안을 주는 추상적 요소이다. 각각의 종이는 원형이나 나선형 혹은 뾰족한 퍼즐 같은 명확한 패턴 아래 배치되어 전체적인 게슈탈트를 완성하지만 목적성을 상실한 무질서한 표면이 주는 작품의 질감은 관람객을 혼란에 빠트린다. 작가의 시각 지능이 갖는 완전한 독창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그는 여전히 사회 현실의 실태를 반영하는 재료를 통한 작업 같은 보다 심도 깊은 무언가를 갈구한다. 실제 이미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고 거대한 예술 작품의 한 요소로서 그것의 기능 안에 갇혀있다.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됐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상징적 행위와 집단적 태도의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의 내적 자아, 즉 사고와 감정을 탐색할 수 있다. 작가는 예술을 단순한 물리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탐구를 위한 개인의 노력과 시도임을 믿는 일종의 탐험가로 인간의 내적 삶에 호소하는 작품을 구현하고 있다. 작가 김춘환이 요구하는 것은 물질 그 이상이 되어버린 그리고 깊은 통찰의 대상으로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바꿔가고 있는 버려진 종잇조각들로 지탱되어 있는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성찰이다. 조나단 굿맨, 2012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자 기자이며 강사이다. 현재 뉴욕 브룩클린에 위치한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현대 미술 평론과 순수미술 석사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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