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I JINWON
호흡 BREATHING
이진원 JINWON
OCT 19th - NOV 16th, 2024
Opening | Oct 19th, 4-7pm
"초대합니다."
우리 화랑의 이번 가을 기획전시는 작가 이진원이 발표하는 신작들입니다. 마지막 개인전 이후 4년간의 창작품들이 운중화랑을 보라와 쪽빛으로 물들입니다.
이진원은 자연 내지 풍경과 작가 자신 사이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의 교감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작품에 담아냅니다. 작가가 풍경과 교감하는 방식은 지극히 직설적이고 본능적입니다. 작가는 그 앞에 놓인 사물을 먼저 감각기관, 특히 호흡을 통하여 그 색깔의 이미지로 수용합니다. 작가에게 사물의 형상은 이미지화된 색깔의 집합체이고, 이 형상의 파동이 공간을 형성합니다.
작가가 사물과 공간을 인지하는 과정은 호흡기관이 주도합니다. 호흡을 통하여 작가 내면에 들어온 색깔의 이미지는 그 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롭게 시각화되고, 이것이 작가의 손끝에 걸린 붓을 움직입니다. 호흡을 통해 받아들인 색깔의 이미지가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서 일어나는 내면활동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한 결과물이 이진원의 화폭입니다. 관람자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 ‘그린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마치 생명체로서 ‘호흡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 행위는 모두 아주 본능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본질적입니다. 본능적이지만 본질적인 이것들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작가는 믿는 듯합니다. 한 순간의 한 줄기 빛과 한 모금의 호흡이 소중합니다. 어떠한 왜곡도 없이 자아를 마주하며 표현된 그의 작품과 우리 화랑의 창 너머 절정의 단풍이 이루어 내는 완벽한 하모니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Yi Jinwon, BREATHING WE INVITE YOU. Our gallery will hold a special exhibition this fall to present new works by artist Yi Jinwon. New works created over the past four years since her last solo exhibition will transform Woonjoong Gallery into a purple and indigo space in this beautiful season. Yi Jinwon interacts with nature and landscapes in her own special way, and she captures her own experience of this interaction in her work. The way the artist interacts with landscapes is extremely direct and instinctive. The artist first accepts the objects in front of her as images of their own colors through her sensory organs, especially through her breathing. For the artist, the shape of an object means a collection of specially imaged colors, and the waves of these shapes come together to form a larger space. In this way, the respiratory system plays a leading role in the process in which the artist perceives objects and spaces. The images of colors that enter the artist’s inner world through breathing are newly visualized, crossing the boundaries between her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which moves the brush on the artist’s fingertips. The images of colors accepted through her breathing are newly created through her inner activities that occur in both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and the result is Yi Jinwon's canvas. The viewers can look into the artist’s inner world, which is reflected in the most primitive way in her works. For this artist, ‘drawing’ as an artist is no different from ‘breathing’ as a living human being. Both acts are very instinctive, but at the same time, they are the most essential. The artist seems to believe that these instinctive but essential things are closest to the truth. A momentary ray of light and a sip of breath are very precious to the artist. You can look forward to the perfect harmony between her works, which express the artist’s self without any distortion, and the autumn leaves at their peak beyond the windows of our gallery, Woonjoong.
MEET ARTIST

YI JINWON
1970 Born in Seoul, Korea
EDUCATION
1992 B.F.A, Hong-ik University
1995 M.F.A, Hong-ik University
SOLO EXHIBITIONS
2020 Thinlines (GalleryDam)
2014 All Things Shining (Gallery Dam)
2012 Forest (Gallery Oms, New York)
2008 Blooming (Mokin Gallery)
2003 Green Stem (Gallery Doll)
1996 Daily energy, Reform a Experience (Kwanhoon Gallery)
1996 KongPyung Art center
GROUP EXHIBITIONS
Over 20times Including
< Vertical Surface of the water, Superiorgallery, 2022>
PRIZE
1993 The 12th Grand Arts Exhibition of korea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1994 The 13th Grand Arts Exhibition of korea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Awarded Special Prize in the 4th Grand Art Exhibition of MBC (Seoul Art enter) Awarded Special Prize in the Art Exhibition of Chun-chu (Seoul Art center)
1995 The 14th Grand Arts Exhibition of korea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he 5th Grand Arts Exhibition of MBC (Seoul Art enter)
PUBLIC COLLECTION
Keungki-do Museum of Art
Art Bank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Privite collections.
ART WORKS
EXHIBITION VIEW
ARTIST STATEMENT
십여년전, 나는 뉴저지의 리지우드라는 마을에서 일년 정도 머무르며 작업한 시기가 있었다. 목조주택 2층 작업실 창문으로는 초록의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나뭇잎사이로 일렁이는 색채의 파동들, 주변 숲의 공기와 빛 속에서 온전히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 시기부터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이미지를 찾아내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나의 추상성의 과정이 시작된 듯하다. 기존에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감성적인 표현과 정서들을 벗어나 남아있는 형태가 사라지며 빛과 호흡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통 동양화 재료인 배접된 장지를 기반으로 아교반수한 후 수간안료, 석채 콘테, 등의 다양한 재료로 작업해오다가, 새롭게 캔버스와 아크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형태 본질적인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사용하기에 효과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린넨 위에 아교반수하고 아크릴 물감, 동양화 붓, 서예 붓 등을 사용하곤 한다. 동양화 붓은 몸의 움직임에 좀 더 민감하게 작용해서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나에게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몸은 색채에 심하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시기별로 매혹되는 색이 변화했는데, 초기에는 빨강색 계통의 작업을 주로 하다가, 짙은 초록이나 투명한 하늘색, 신비에 둘러싸인 원형과 같은 보라색 등으로 옮겨 다니며 그 색을 탐닉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주로 순도가 높은 안료를 조합하고 여러 번 레이어드 하는데, 미묘하게 투명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을 좋아하고, 때론 떠 있는,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 나타날 때도 있다. 색채와 함께 ‘빛’은 화면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빛은 생성과 소멸, 모이고 흩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화면의 안과 밖을 관통하는 역할을 한다, 무수한 붓질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원하는 색채와 빛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몸의 흔적이 조형적으로 겹쳐지는 것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자기만의 ‘호흡’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가끔 몸의 철학, 리듬, 태도가 세상과 화면과 나를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흡’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고, 무의식과 접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고, 공기의 흐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안과 밖이 만나는 그 미묘한 접촉점은 투명한 유기적 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화면에서 나타나는 지평선과 수직선들은 존재론적 긴장감과 풍경적 요소의 양의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때론 들판의 풀들, 하늘, 태양의 진동등으로 나타난다. 명상적 세계, 자연, 신체성 등이 축적되어 하나로 연결되고, 몸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추상성이 내포되어 나타난다. 글=이진원
CRITICISM
이준희 / 부드럽지만 강한, 추상의 힘 살다보면 가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트릴 때가있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우연’ 또는 ‘공교롭다’고 한다. 포털 검색창에 ‘공교롭다’를 쳐봤다. “생각지 않았거나 뜻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건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나오더라. 애초 짐작했던 뜻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우연’이 ‘공교롭다’는 말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조금 흥미로웠다. 앞으론 우연과 공교로움을 구분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뜬금없이 이런 말부터 꺼낸 배경은 이렇다. 이진원 작업실에 가기 며칠 전, (우연히) 책 한권을 읽었다. 그런데 작업실에서 그림을 보자마자 (공교롭게도) 그 책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선 차마 이 얘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집에 돌아와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온 그림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러고는 부랴부랴 그 책을 꺼내 밑줄 친 부분을 찾아 다시 봤다. 아니나 다를까, 불현듯 이 말을 되뇌었다. “참~, 공교롭구나!” 이 책에 나오는 추상화에 관한 문장 한줄 한줄이 이진원 그림을 두고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막연히 궁리하던 생각과 적합하게 일치했다. 이진원 신작을 처음 보곤 ‘공교롭다’고 생각한 이유다. 앞에 말한 책 제목은 『구원의 미술관』(사계절, 2016). ‘그리고 받아들이는 힘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재일(在日) 한국인 2세로 태어난 강상중 교수.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대한민국 국적자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가 된 인물이라고도 한다. 미술과 거리가 먼 정치학자다. 그럼에도 2년 동안 일본 공영방송 NHK 인기 프로그램 사회를 맡아 진행했다. 학자로서 명성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에서 소개했던 미술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예술론을 에세이로 풀어냈다. 특히 ‘추상화’에 대한 설명 부분이 인상 깊었다. 조금 길지만 밑줄 쳤던 몇 대목을 옮겨 적으면 이렇다. 먼저, “불가해(不可解)라고 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그 순간 주위 세계가 갑자기 멀리 달아나거나 원근법이 거꾸로 바뀐 듯이 느껴지는, 꿈이라고도 현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을 맛본 적이 있지는 않은지요?” 이어서, “그림이란 보통 화가가 캔버스 위에 먼저 무언가를 그리고, 우리들은 그려진 것을 보고 무언가를 읽어냅니다.” (중략) “작품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림 속에 나타납니다. 클레는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제가 받은 느낌 또한 바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추상화는 어찌하여 등장한 걸까요?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그려서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복잡하고 불가해해서 구체적인 무언가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사람은 추상화로 나아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들은 결코 표상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해낼 방법을 탐구한 끝에 결국 그러한 표현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옴표 속 위 문장은 강상중 교수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작품을 보고 언급한 내용이다. 놀라운 통찰이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단락이 인상 깊다. 이처럼 그의 글은 웬만한 미술사학자나 비평가보다 논리적이고 매력적이다. 그야말로 명석판명(明晳判明), 누구라도 선뜻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의견이다. 그래서 이진원 근작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적합한 글을 찾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추상으로 번안된 풍경 서두가 길었다. ‘추상(화)’를 키워드 삼아 이진원 작품을 살펴보자. 먼저 내용적인 측면. 그림의 출발은 자연이다. 바꿔 말하면 풍경이다. 핵심 모티프는 풍경에서 받은 감흥(感興), 즉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심상(心想)을 표현한 추상 풍경(화)’라 할 만 하다. 초기 작품엔 구체성을 띤 형상도 일부 보였지만, 차츰 이런 요소가 사라졌다. 최근엔 추상성이 더 짙어졌다. 신작은 이른바 ‘색면 추상화’에 가깝다. 무게중심이 형상에서 컬러 쪽으로 옮겨진 형국이다. 여느 풍경그림과 다른 감각을 보여주는 차이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겉모습이나 형태에서 벗어나 내면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색채 위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진원은 망막에 투영된 이미지를 그대로 캡처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곧이곧대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박제(剝製)처럼 무감각하게 기록하지도 않는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정서(情緖)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거기에 반응한다. 풍경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호흡과 감성의 리듬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체험의 순간을 주관적으로 구현한다. 이때 나무, 풀, 꽃, 숲 따위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특정 장소나 시간, 어떤 사건과 상황, 시야에 들어온 광경 등을 자세히 서술하지도 않는다. 대신 구체성과 거리가 멀고, 고정된 실체가 아닌, 비가시적인 무형의 감각을 그린다. 강상중 교수는 이런 걸 일컬어 ‘불가해(不可解)’라고 말했다. 이진원 그림이 그러하다. 예컨대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며 반짝거리는 햇살, 나뭇가지를 흔드는 공기의 흐름, 새벽 숲에서 느끼는 청량한 바람의 감촉, 시시각각 변화무쌍 바뀌는 대기의 색채 같은 것들이다. 이런 건 말이나 그림으로 설명 불가능하다. 그림에서 구체적 형태나 객관적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이진원은 십여 년 전, 미국에서 겪었던 자연에 대한 색다른 체험이 본격적으로 추상을 추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무렵 작품부터 형상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색채-컬러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해 보자. 이진원은 색채에 민감히 반응해 왔다. 신작은 보라색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그린, 블루 같은 푸른색 계열도 일부 있다. 초기작은 강렬한 붉은 색이 두드러졌다. 이후 짙은 초록이나 맑은 하늘색으로 주조색이 바뀌었고, 최근엔 보라색에 탐닉하고 있다. 보라색은 한때 즐겨 사용했던 레드와 블루, 두 색을 혼합해서 나온 결과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보라색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러 가지 물감 색이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매끄럽고, 딱딱하고, 균질한 평면이 아니다. 깊고 그윽한 공간감이 전해지는 평면이다. 울림과 떨림을 발산하는 심연(深淵)의 색면이라 하겠다. 예전엔 장지(壯紙) 위에 수간안료(水干顔料)로 채색했다. 장지는 전통 한지(韓紙) 종류 중 하나로 두툼한 종이를 말한다. 신작은 린넨(linen)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재료는 바뀌었지만 기법은 여전하다. 바탕 면에 아교액(阿膠液)을 도포하고 그 위에 묽게 희석한 물감을 여러 차례 얇게 바르기를 반복한다. 이때 동양화 붓이나 서예 붓을 사용한다. 이 붓은 뻣뻣하고 거친 유화 붓과 달리 부드럽고 힘이 없다. 이런 특성이 오히려 수성물감과 궁합이 잘 맞는다. 오랫동안 다뤄 와서 익숙한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신체를 움직이면서 느껴지는 기운, 에너지가 화면에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 붓을 고수한다. 재료와 기법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시도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진원을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대목.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부분이 있다. ‘빛’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구상회화에서 그림자로 입체감을 표현하듯 이진원은 컬러로 빛을 보여준다. 빛을 ‘그린다’가 아니다. ‘보여준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사실 빛은 그릴 수 없다. 빛은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상(虛像)이다. 손으로 움켜 쥘 수 없고, 촉감도 없고, 무게도 없다. 빛과 색은 엄밀히 다르다. light와 color의 차이를 떠올리면 된다. 과학자들은 이 둘을 철저히 구분한다. 색은 물질이고 빛은 비(非)물질이기 때문이다. 색은 물성(物性)을 지닌 반면 빛은 실체가 없다. 색을 보기위해선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어둠에선 절대로 색을 볼 수 없는 이치다. 빛과 추상을 동일시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진원의 최근작에서 추상성이 두드러지는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물의 형태가 아니다. 빛을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진원 그림에 담긴 의도다. 빛을 그리다 마지막으로, 앞서 인용한 강상중 교수 글에 호응하듯, 이진원 작업노트 일부를 옮겨본다. “색채와 함께 ‘빛’은 화면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빛은 생성과 소멸, 모이고 흩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화면의 안과 밖을 관통하는 역할을 한다, 무수한 붓질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원하는 색채와 빛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몸의 흔적이 조형적으로 겹쳐지는 것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자기만의 ‘호흡’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가끔 몸의 철학, 리듬, 태도가 세상과 화면과 나를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흡’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고, 무의식과 접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고, 공기의 흐름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안과 밖이 만나는 그 미묘한 접촉점은 투명한 유기적 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화면에서 나타나는 지평선과 수직선들은 존재론적 긴장감과 풍경적 요소의 양의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때론 들판의 풀들, 하늘, 태양의 진동 등으로 나타난다. 명상적 세계, 자연, 신체성 등이 축적되어 하나로 연결되고, 몸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추상성이 내포되어 나타난다.” 여기에 어떤 설명이나 해석이 더 필요하겠는가? 곱씹어 읽어 보면 안다. 그림에 담긴 속뜻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첫 개인전은 1995년, 지금은 없어진 인사동 공평아트센트에서 였다. 운중화랑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여덟 번째 개인전. 2020년 담갤러리 개인전 이후 5년 만이다. 10대 시절 예고를 졸업하고 학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니 화업(畵業)이 어언 40여 년에 이른다. 평균 5년마다 한 번씩 개인전을 연 셈이다. 성실하고 꾸준한 패턴이다. 오랜 기간 쉼 없이 작업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그림 그리기에도 지름길이 없다. 오직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갈 뿐. 엷은 물감을 수없이 반복해 칠하면서 겹을 쌓아가는 과정이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를 ‘아는 사람,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사람, 앎을 추구하는 사람, 앎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했다고 한다. 빗대어 말하면, 화가 이진원은 ‘그리고자 하는 사람,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림’은 명사(名詞)고 ‘그리다’는 동사(動詞)다. 이진원은 후자에 가깝다. 현재 진행형 작가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운중화랑 출품 신작은 이진원의 ‘지금, 여기’의 좌표를 알려준다. 추상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이진원 그림이다.
고충환 / 이진원의 회화_자연의 본성을 품은 그림, 감각으로 지은 집 무의미함, 가장 두렵게 여기는 것, 최종적인 진실인지도 모른다...어떤 사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질 없음을 극복하는 것...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것들, 진한 초록, 신비로운 숲,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가 이내 흩어지는 입자들, 지금 나를 매혹하는 건 그런 것들 이어서, 너무나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우선 그 속에 머무르며 빛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작가 노트). 무의미한 삶은 가장 두려우면서도 최종적인 진실이다. 성경은,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의미한 삶이 두려워서 종교에 귀의한다. 어느 정도 예술 역시 그렇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 복무한다. 마치 종교와 예술이 무의미한 삶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듯이. 니체는,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무의미한 삶을 설명 그러므로 해명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미학만이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 여기서 미학은 또 다른 무의미함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무의미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니체의 말은 무의미함만이 무의미한 삶을 해명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니체가 보기에 미학 그러므로 예술의 지상과제는 무의미한 삶에 맞서는 것에 있다. 존재론적 결핍 의식 그러므로 타고난 결핍 의식에 대적하는 것에 있다. 이로써 이진원은 자신이 예술에 복무하는 가장 숭고한 이유를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무의미한 예술을 통해 무의미한 삶에 맞선다는. 무의미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예술이라는 말이기도 한데(여기서 예술은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가 된다), 어떤 사물을 그리는 것이 부질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떤 사물의 감각적 형상을 따라 그리는 그림은 여기서 배제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물 대상의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면 뭔가. 바로 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것들, 진한 초록, 신비로운 숲,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가 이내 흩어지는 입자들이고, 지금 작가를 매혹하는 것들이다. 그 성분이며 성질에서도 추상할 수 있는 것이, 감각적 형상보다는 감각적 현상이다. 세계가 의미화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어쩌면 의미화의 과정과는 상관없이 있었던 자연현상이고, 자연과 작가가 상호 교감하는 감각 현상이고, 자연과 작가가 서로 삼투되는 현상이다. 그렇게 내가 자연을 보면(시선), 자연도 나를 본다(응시). 내가 자연을 보면서 자연의 일부로서 기입이 되고, 자연이 나를 보면서 내 속에 내재화된다. 그렇게 나는 자연이 되고, 자연은 내가 된다. 동화현상(다르게는 동일시 현상)으로 봐도 되겠고, 물아일체의 경지로 봐도 되겠다. 세계와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살로 채워져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는,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내 의식을 생성시키고 내 몸이 자연에 연장되는 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의 차원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 자기를 매혹하는 것들 속에, 그러므로 자연 속에, 그리고 자연과 자기가 교감하는 감각 현상 속에 머무르면서 빛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서 빛나는 것들은 스스로 발광하는 자연을 의미하기도 하고,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지만 사실상 빛나는 순간에 유비 될,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본성으로 빛을 발하는 자연현상의 찰나에 미친다. 그 순간, 그 찰나에 작가는 매혹되는 것인데, 그 자연현상이 순간만큼만 찰나만큼만 지속되는 것이란 점에서 작가는 덧없는 것을 그리고, 그러므로 어쩌면 무의미한 것을 그린다. 다시, 그러므로 덧없고 무의미한 것만큼이나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것(그러므로 어쩌면 순간)을 그린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를 실제로는 멀리 있는 것인데(신적 존재?)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신의 표상?) 감정이라고 했는데, 그런 아우라를 그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암시(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혹은 가시적인 것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기술)가 되겠고, 우리 말로 옮기면 분위기가 되겠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는 자연의 감각적 형상보다는 감각적 현상이, 의미화되지도 개념으로 환원되지도 않은 감각적 현상 고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자연의 감각 현상을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그리고, 자연이 빛나는(자연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에 발하는 분위기를 그리는 것이다(여기서 교감은 자연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의 분위기를, 어쩌면 극적인 사건을 포획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숲속에서 올려다본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산란하는 빛의 질료를 보는 것도 같고,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은 듯 미세하게 일렁이는 수면에 아롱대는 빛 알갱이를 보는 것도 같고, 수중에서 올려다본 수면에서의 희미한 빛의 기미를 보는 것도 같고, 투명한 레이스가 겹겹이 포개진 해파리의 하늘거리는 유영을 보는 것도 같고, 칠흑 같은 밤을 배경으로 터지면서 쏟아져 내리는 폭죽의 장렬한 주검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일부 그림에 붙인 제목으로 유추해보면, 어스름한 대지 위로 첫 빛의 기미가 내려앉는 순간을 그린 것도 같고(해 뜨는 땅), 숲속에서 작렬하는 빛의 세례를 받아 나무의 형태가 해체돼 보이는 극적 순간을 그린 것도 같다(황금빛 나무). 이 모든 그림에 빛이 있고, 빛의 기미가 감지된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도 있다. 빛은 어두움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어두움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빛을 그린다는 것은 동시에 어두움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자연에 대한 감각의 경험치는 빛과 어두움의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빛의 질량과 어두움의 정도를 조율하는 것에 있고, 이때 그 조율하는 도구가 감각이다. 지극한 빛은 형상을 지우고, 지극한 어두움 역시 형상을 삼킨다. 빛에 가까울수록 사물성이 부각 되고, 어두움 쪽으로 치우치면 분위기가 강조된다. 그건 마치 하이데거의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을 보는 것도 같다. 대지는 진리를 숨기고, 세계는 진리를 드러낸다. 대지는 세계에 의하지 않고서 진리를 드러낼 방법이 없고, 세계에 의해 드러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의 개념이고, 죽은 진리에 지나지 않은 것. 그러므로 진리를 보존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이 예술의 지상과제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이율배반이 그 방법론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 여기서 대지와 세계의 자리에 대신 어두움과 빛을 대입해보면 그대로 작가의 그림(그러므로 감각)이 작동하는 원리가 된다. 어두움 속에 분위기(어쩌면 감각과 함께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결정적일 수 있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빛의 기미를 빌려 그 분위기를 감각의 표면 위로 그러므로 그림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정작 빛이 아닌, 분위기를 품고 있는 어두움이 된다. 다시, 그렇게 표면적으로 볼 때 작가의 그림에서 빛이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빛은 어두움에 종속되는 것이며, 어두움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부수되는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보존되면서, 동시에 드러나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위기란 뭔가. 작가의 그림에서 그토록 결정적인 분위기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다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사실은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사실은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인데 가시를 통해 설핏 보았다고 느끼는 감정이며, 가시를 통해 볼 수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그게 뭔가. 암시다. 암시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가 없다. 어떤 기미이며, 어떤 여운이고, 어쩌면 어떤 착각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기미(최소한으로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와 여운(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심지어 부재에서마저 여전히 존재를 보는 것)으로 하여금 그림 그러므로 감각의 기술이 되게 하는 것에 암시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고 기능이 있다. 그렇게 무엇이 드러나 보이는가. 그렇게 무엇이 감지되는가. 그렇게 분위기에 부수되는 것은 뭔가. 아니마다. 자연의 호흡과 숨결이며 원초적 자연의 숨이다. 자연이 작가의 내면 그러므로 그림 속에 심어놓은 울림이며 내적 울림이다(그러므로 그림은 작가의 몸이다). 작가의 그림 속엔 기포가 있고, 비정형의 크고 작은 얼룩이 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하는 점들이 있고, 희미한 그래서 은밀한 선들이 있다. 그 형식요소(아니면 차라리 감각 요소)가 마치 내면(혹은 오히려 심연)에서 자기를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어스름하고 은근한 색채감정과 어우러지면서 켜켜이 중첩된 레이어를 만들고, 화면 안쪽으로 투명한 깊이를 만든다. 여기서 점과 선은 모더니즘의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을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본성에 의한 것이며, 특히 선은 직선일 때조차 곡선으로 보이고 유기적으로 보인다(훈데르트바서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00 같은, 다만 00처럼 보일 뿐,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지목할 수도 특정할 수도 없는 암시적인 형태 혹은 차라리 감각이 규정할 수도 개념으로 환원할 수도 없는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을 열어 보인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첫 빛의 기미가 어스름을 깨우는 대지 앞에 서게 만들고, 숲이며 나무의 형태를 해체 시키는 빛의 세례 속에 서게 만들고, 빛과 바람이 희롱하는 수면 앞에 서게 만들고, 희미한 빛의 기미가 올려다보이는 물속에 서게 만든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렇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들게 하고, 환상(작가의 그림이 감각적임을 인정한다면, 차라리 환각)에 대면하게 만든다. 사실 작가에게 환상은 감각만큼이나 오래된 일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전작에서 보면, 흡사 샌디 스코글런드의 초현실주의 사진에서처럼 금붕어가 유영하는 방(꿈꾸는 침대)이 그렇고, 꽃들이 만개하는 소파(꿈꾸는 소파)가 그렇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상황도 그렇지만, 붉은 색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색채감정이 그림을 환각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마치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의 투명한 깊이를 머금은 붉은 색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여기에 집을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희미한 그래서 은밀한 가장자리 선으로 축약된, 켜켜이 중첩된 선들이 투명한 깊이를 만드는 집이다. 아마도 작가가 내면에 지은 집일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이데거를 인용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으로 지은, 다시, 그러므로 또 다른 언어로 지은 존재의 집일 것이다. 감각으로 그러므로 예술로 무의미한 삶을 건너가기 위해 지은, 자신만의 성소일 것이다. 글=고충환(미술비평), 2020
홍가이 / 이진원 작가의 작품 속의 예술, 정신성과 자연 I.한국 화가 이진원 최근 작품은 모두 예술과 정신성, 자연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주제는 “Wood in Winter”(65 x 81 cm, 2008)와 “Breath”(191 x 129 cm, 2005), “무제”(191 x 129 cm, 2004), “바다”(174 x 125 cm, 2006), 그리고 “바다”(35 x 27 cm, 2003) 등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Sea” 라는 큰 그림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틀림없이 해변, 잔잔한 바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흐릿한 하늘로 구성된 바다풍경이다. 그러나 해는 높이 떴는데도 짙은 안개는 걷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해 보인다. 이런 짙은 연무는 땅 바다 하늘을 가리지 않고 온 세계를 덮어버린 모양이라 화면은 완전히 평평해 보인다. 하늘과 바다, 땅이 모여서 한 장의 평평한 판이 된 것처럼. 이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 완전한 잔잔함이다.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고 바다에서 헤엄치거나 해변에서 산책하는 사람도 없다. 바다 위에는 고깃배조차 없다. 빛이 짙은 안개로 인해 해도 엷어 보이며, 허연 안개에 흡수되는 많은 광선들이 안개를 담홍색으로 염색한다. 이 작품의 분위기를 제다로 담으려면 “still”(잔잔하다), “serene”(평화롭다), 또는 “calm”(고요하다) 등 영어 형용사들이 쓸 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압도적인 ‘고독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표현함에도 불하고 기본적으로 따스한 기운을 뿜어낸다 . 이 그림이 담은 바다풍경은 이 지구의 많은 대양이나 내륙 바다 아무데서나 찾을 수 있는 매우 평범한 바다풍경이다. 이진원이 그려낸 풍경은 어느 바다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바다풍경을 그리는 이유를 어느 한 특별한 곳의 한 특별한 풍경을 그내는 것이라고 하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러한 바다풍경이 드러낼 수 있는 한없이 다양한 분위기 중에 특별한 분위기를 내는 바다풍경을 담아내기로 한 것이다. 같은 바다라 하더라도, 바다풍경을 깜깜하게, 거친 바다가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가 하늘을 찌르는 장면을 연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럴 경우의 바다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줄 것이다. 또는, 바다가 잔잔하고 안개도 없이, 색조는 차가운 하얀색과 파란색, 해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되 하늘은 맑고 해를 둘러싸는 안개 없이 그린다면 바다풍경 분위기가 아무 따뜻함이 없는, ‘썰렁한’ 고독함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그려낸 정적과 절대적 고요함에는 다분한 의도가 내제 되어있다. 작가가 그려낸 ‘잔잔함’과 ‘고요함’의 느낌은 靜 이라는 한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해변가에 잎이 무성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바다풍경 그림을 통해서도 작가는 완전한 잔잔함, 즉 靜의 깊은 조용함을 표현한다. 大學에서는 [大學 인용구: 홍가이 선생님께서 원문을 제공하신답니다]. 이렇게 유교나 불교, 도교 등 동양의 정신 수양법들은 하나같이 궁극적인 목적이 Oneness with Universe, the perfect community or communing, or connectivity [홍가이 선생님께서 원문을 제공하신답니다]인 정신적 탐구에서 수양을 한다. 이진원 작가의 이 그림은, 바로 잔잔함과 고요함의 마음, 즉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인 靜을 드러내는 매우 정신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장자가 齊物論이라고 이르는 것, 즉 바로 “하나도 아니면서도 둘도 아니라”고 의미하는 불교의 관념인 不一不二이다. 다시 말해, 천지만물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두루 관통한다; 장자의 나비의 꿈처럼 나비 같은 벌레조차 장자 같은 사람과 어떤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사실 바로 이런 (노자와 장자의 중국 도교 철학에서 볼 수 있는) 齊物論을 전제로 해야 “무제”(191 x 129 cm, 2007)같은 크기의 또 다른 2007년 작품 ‘무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2004년 작품에는 사람의 윤곽으로 보이는 형태가 진한 녹차색의 어두운 배경에서 빛나는 연두색 잔디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실루엣만 보이는 이 모습은 짙게 어두운 배경에도 속하기도 하고 잔디밭, 또는 싹트는 보리밭에 속하기도 한다. 이 인간의 모습과 배경, 전경이 다 서로 관통하듯이. 어쩌면 이진원 작가는 온 몸으로 자연과의 밀접하고 완전한 관계를 맺으며, 이런 관계에서 앞서 말한 ‘잔잔하게’ 고요하고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그림들이 흘러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림들은 작가의 눈이라는 하나뿐인 기관을 통한 자연의 시각의 지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작가와 자연(또는 기(氣))의 상호적 존재론적 관통에서 비롯된다. 이진원 작가가 그리는 그림은 시각의 지각만으로 표현할 수 없다. 작가는 자연과의 명상적인 관계에 빠져들어 靜을 찾아내며, 이러한 바다풍경 속에 靜의 마음이나 상태를 드러낸다. 이진원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동양의 정신적 주제를 다루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필법과 한지의 독특한 물성, 수채화 물감 같이 두꺼운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 등을 이용한다. 작가가 온 화면을 앞서 말한 바래고 흐린 백분빛으로 전 화면을 칠하는 것은 서양식 유화 물감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Breathing”(191 x 129, cm, 2005) 등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는 동양의 필법의 틀림없는 흔적이 더더욱 뚜렸하다. 이 작품은 길게 늘어뜨린 뿌리와 가는 줄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또는 아래로부터 위로 한 줄의 획으로 그린 것 같은 어떤 식물의 그림이다. 다시 말해, 지저분하게 늘어뜨린 뿌리와 가는 줄기, 그리고 잎사귀는 애매모호한 상호간의 관통 속에서 그려져 선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작가가 그리는 선에는 길고 가는 다리 같은 직선감이 있으면서도 이 직선성은 ‘몸통’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굵지만 잎이 무성한 윗부분일 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번진다. 잎이 무성한 식물 윗부분들은 서로 얽혀 있는 것 같으나 혼란한 불화의 얽힘은 아니다. 식물들은 사이 좋은 조화 속에서, 장자의 齊物論의 뜻으로 서로 얽히거나 관통한 것이다. 이것은 혼란한 얽힘은 아니고 상호간에 공명되고 서로 호흡이 맞추어진 관통이기 때문에 식물과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물방울 조차 식물과 윗부분처럼의 끝없는 얽힘과 율동적인 춤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작은 물방울을 둘러싸는 쾌적한 기운이 난다. 그림의 윗부분이 어떤 힘찬 상호간의 공명을 지적하는 것 같지 않는가? 이것도 역시 각종 명상이 추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자연과의 합일(合一), 어떤 완전한 연관성 등을 드러낸다. 이진원 작가는 그러한 정신적 지복을 소박하게, 우아하게, 그리고 진정성 있게 표현한다. “Wintry Wood”(66 x 81 cm, 2008) 같은 그의 그림을 보자. 작가는 소박하면서도 신중한 감각으로,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으로도 어떤 완전한 평화로움, 자연과의 합일에서 유래되는 안심을 그려낸다. 땅거미가 지기 직전에 내려앉는 해의 마지막 볕이 숲을 비추면서 밤의 어두움을 들일 때처럼어떤 대단히 뚜렷하고 조화롭게 울리는 음악 – 말하자면 자연의 합창곡이 – 들려 온다. “Wintry Wood”의 아름답게 길고 다리 같은 나무를 살펴 보자. 더없이 행복한 합일감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화면 사각의 가장자리를 넘쳐 우주 속으로 번져 나간다. 인류의 정신적 탐구의 진수를 이렇게 소박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에 부치는 송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기술을 위주로 하는 현대 문명에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음껏 이용하는 물건이나 되어 버린 것이다. 정신 세계의 위기는 인문주의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 서양 지식층의 정신적 갈망의 현상; 즉 함부르크나 파리, 베를린, 보스턴, 뉴욕 등 서양의 주요 도시에 스타벅스보다 명상원, 선 수련원 등이 더 많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서양 사회의 5% 내외의 소수의 사람들만 일요일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잘 보여 주듯이 개신교나 천주교 등 서양의 전통적인 종교는 서양인들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현대 미술도 역시 근대 인류에게 아무런 정신적인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칸트가 생전의 마지막 대표작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인류의 정신적 탐구와 무관하지는 않다: “예술은 완전한 공동체을 향한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열망의 표현이다. 바로 이런 열망은 인간의 정신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바탕이다.” 서양의 현대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 (아서 단토가 말한) 탈역사적 미술 등은 (인간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마다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교육을 받은 서양인들이 교회는 물론, 미술관이나 비엔날레도 안 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계는 완전히 자립적이고 독재적이며 주변 사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양 미술계의 하나인 존재 이유는 탈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인 책동을 하기 위해서다. 이진원 작가 같은 작가는 부패한 파리, 뉴욕, 베를린 등 이른바 국제적 미술의 중심지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 중심들의 최신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일에 몰두해 왔다.. 서양의 헛된 화려함의 그림자 속에서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은 가까운 미래에 보상을 거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작가들의 (동양식 회화를 통한) 정신적 탐구를 담은 작품은 바로 전세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글=홍가이(예술철학박사), 2010
임종업 / 숲속의 ‘물아일체’_이진원 개인전 “모든 것은 반짝인다” 한국화가 이진원(45)이 담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사진.29일까지)의 제목이다.내걸린 15개의 작푸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나무향을 머금은 바람, 잎새 사이로 얼비치는 햇빛, 그 빛을 받아 떠도는 입자들. 작가는 미국 뉴저지에서 이방인으로 머물때 느꼈던 물아일체의 경험을 화폭에 옮겼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눈에 비치는 대로, 또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의 환희를 그대로 재현했으니,결과물은 추상인 동시에 구상이다. 장지 위에 동양안료로 그리는 동양화는 쌓을수록 색채가 분명해지는 게 특징. 분명한 색채가 일런이고 반짝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작가는 작은 붓으로 무수한 점과 선을 그려 층을 쌓는다. 실제 그림을 보면 미세한 터치 너머 서너 겹의 층이 보인다. 반복되는 작업에서 경험하는 무념무상의 경지는 숲속에서의 느낌과 더불어 작가 자신을 치유한다고 한다. 숲속의 느낌을 작업실로 바로 옮겨온 것들은 밝고 선명하지만, 느낌을 곰삭인 뒤에 그린 것들은 색깔과 반짝임이 사라지면서 깊이를 더한다. 붓두껍으로 찍은 듯한 무수한 동그라미는 하나하나 채도를 달리해 그린 그림들이다. 명상과 치유는 짝을 이루어 상승작용을 하는데, 작가의 작품에서 그 과정이 여실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작품은 수행의 부산물로, 일종의 덤이다. 문제는 언제 붓을 놓느냐는 것, 작가는 조형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게 없을 때라고 했다. 그것은 곧 욕심을 버리는 순간인데,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작가 나이 마흔다섯이면 그만한 결단력이 왜 없겠는가. 글=임종업기자(한겨레 신문), 2014
박영택 / 몸으로 건져 올린 자연 작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의 촉수로 거느리고 그것으로 포착하고 그려나간 자연과 세계를 보여준다. 섬세한 신경세포들이 포착한 식물성의 세계가 하나의 풍경을 그려 보인다. 이진원의 그림은 손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온 몸으로 그렸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몸이 받아들이고 흡수해낸 총체적인 느낌이 감각적으로 표현, 기술되고 있는 그림이다. 감성적이고 예민한 흔적들이 건져 올린 풍경은 자연에 대한 감상과 사물과 일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관조적 시각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시작해 결국 내면을 보여주고 비추는 거울 같은 그림이다. 몽상과 은유로 가득한 애매모호한 회화의 세계 안에서 형태는 최소한의 표지로만 기능한다. 몸과 자연/식물이 교차하고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공존하며 현실과 상상이, 의식과 무의식이 몇 겹으로 차올라 흔들린다. 탁자위에서 풀이 자라고 빨간 금붕어들이 실내를 떠다니고 수많은 꽃송이들이 소파를 만들고 시뻘건 풀들이 머리카락처럼 자라는가 하면 몇 개의 영상이 마구 겹치고 떠오르는 것이 흡사 초현실적인 그림 같다. 화면은 색과 선, 간결한 형상들이 부침하고 떠돌고 흐르는 공간, 마치 물 속 같고 공기 같고 마음 속 같은 장치로 연출된다. 그 안에 일상의 편린들, 그날그날 접했던 소중한 경험과 충만한 감정들이 들어있다. 매일의 단상들이 일기처럼 이미지로 수놓아져 있다. 그 감정을 전달하는 색채는 화면 가득 질펀하고 그 가운데로 날선 선들이, 감정을 머금은 선들이 아래로 몰려 가득하고 울울하다. 작가는 선과 색으로 감정을 전달하고 분위기와 느낌을 극화한다. 선명하게 구획된 형태들이 아니고 모두 흐려지고 모호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대상들이 언어로 규정하기 힘든 색채의 공간 속에 깊이 잠겨있다는 느낌, 그 위로 파열음처럼 몇 가닥 선들이 피처럼 흐르고 혈관처럼 관통하는 그런 그림이다. 인과관계가 지워진 공간에 풀과 뿌리, 몸의 한 부분, 탁자와 꽃, 작은 원들, 실타래나 머리카락 같은 선들, 알 수 없는 선의 궤적이 엉켜있다. 그것은 대상과 내가 분리되는 세계가 아니라 그것들과 내 몸과 의식이 습합되고 교차하고 하나로 되는 기이한 체험을 반영한다. 이진원의 선은 특히 동양화 모필의 흔적을 강렬하게 부감시킨다. 그 선들은 비록 나무와 뿌리를 연상시키고 재현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인 선의 흐름이나 궤적으로 자존한다. 선들은 명확하고 목적의식적으로 그려 졌다기 보다는 자족적이고 감정적이며 그 어떤 것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충만한 상황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선으로 머물고 흐른다. 또한 색채 역시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의 상태를 발화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짙고 어둡고 습한 느낌 혹은 강렬한 붉은색, 또는 언어로 규정하기 힘든 모호한, 흐릿한 색상들이 안개처럼 깔려있다. 무성한 잎과 줄기나 집요한 뿌리가 신경다발처럼 그려지기고 하고 자잘한 원형의 숨구멍, 세포들이 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이 풍경은 식물, 생명에 대한 작가의 눈과 마음을 전달한다. 나무사이로 떠올라 황홀하게 번지고 퍼져나가는 태양, 순간 망막을 아늑하게, 눈멀게 만드는 그 빛의 감흥이 시각화 되거나 어항 속 붉은 금붕어의 유유자적한 유영을 시간과 속도의 감각 아래 펼쳐 놓거나 암시적인 몸의 실루엣과 자연을 함축적으로 연결한 그림들 역시 작가의 일상에서 경험한 자연과 생명체의 이미지화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감수성의 촉수들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경험한 이 자연에 대한 경험과 느낌의 형상화는 전적으로 몸의 감각의 그물로 떠낸 것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산책길에서 본 나무와 풀, 꽃과 그 사이로 빛나는 태양, 작업실 실내 어항에 있는 금붕어들이 그녀가 그리고 있는 소재다. 삶의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접한 그 대상들이 가슴 속에 고여 있다가 화면 위로 다시 환생하고 있다. 이 채색화는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출발해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바램과 그로인해 부풀어 오르는 무수한 상념과 상상력, 감정의 고양을 선과 색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림이다. 자연과 생명체, 그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과 경험의 형상화란 것은 여전히 동양화의 전통과 맞닿아있는 지점이다. 이진원은 그 전통의 선상에서 자기 몸으로 다시 자연과 생명체를 보고 느낀 점들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과 분리되지 못하는 생애, 화가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택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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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하단에 주차 및 교통편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